과거 인기작 리부트는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과거의 인기에 기대어 부적절한 상황을 설정하고 들쭉날쭉한 이야기 전개로 극의 긴장과 완성도가 떨어진 탓이다. 과거 인기작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만 한다. 과거의 팬이라면 향수를 부르는 소품이나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뛰겠지만, 모든 관객이 원작을 봤을 리는 없다. 원작의 유산에 흥분하고 찬탄하는 전개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에게는 어리둥절할 일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던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이 리부트되면 대중의 냉랭한 반응을 얻는 이유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영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재미를 놓치고 원작의 명성에 흠집을 낸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오래도록 끌기 위해 물리적 시한을 늘려 생명력을 만들어낸 결과다.
그동안 마블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등의 영웅이 은퇴한 뒤로 쇠락의 조짐을 보인다는 비관론이 팽배했다. 거대 시장인 중국을 의식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년)>은 비판을 자초하고, 다인종 영웅들이 모인 <이터널스(2021년)>는 호불호가 극명하다. 불호는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되어 오락 영화의 본분을 잊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2021년)>은 흥행에 성공하고 호평도 얻고 있다. 이 영화는 소니픽처스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관 통합 영상화의 포문을 연다. 마블은 이번 영화를 통해 <어벤져스:엔드게임(2019년)> 이후 시들해진 영웅물의 부활을 알렸다.
사실 마블의 팬이라면 멀티버스(다차원 세계)를 끌어들인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에 소니픽처스의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앞서 멀티버스를 선보인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2018년)>가 호평을 얻고 흥행한데다, 스파이더맨을 모은 영화를 내보이는 건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다. 비록 실리를 뒤에 숨기고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인기를 얻는다면 문제가 될 게 없다.
영화는 148분에 달하는 긴 상영시간 동안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전작에서 톰 홀랜드가 연기한 스파이더맨은 유약한 영웅에 불과했다. <스파이더맨:홈 커밍(2017년)>에서 영웅심에 도취되어 사고를 쳤고, <스파이더맨:파 프럼 홈(2019년)>에서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잃은 뒤 영웅의 삶을 잠시 뒤로 한 채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악당 미스테리오에게 속아 고난을 자초했다.
여전히 철없는 영웅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어른이 되기까지는 도움이 필요하다. 절친과 연인을 잃고 맞서 싸운 악당의 죽음까지 상처로 남은 옛 스파이더맨들이 가르침을 주기에 제격이다. 그들과 톰 홀랜드가 벌이는 사투는 박진감을 주기 보다는 짠한 감동을 준다. 후반부에 들어 스파이더맨들과 모든 악당들이 총출동해 백병전을 벌일 때는 환호성을 불러낸다. 스파이더맨들이 한꺼번에 힘을 모아 싸우는 장면은 오랜 팬들에게 바치는 ‘팬 서비스’다. 제작사의 사정이 아닌 팬들의 기대를 충족한 장면이다.
배우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한 스파이더맨은 특색이 강하다. 또 과거 스파이더맨 영화의 악당 역시 각자의 매력이 있다. 과거의 스파이더맨과 악당은 켜켜이 쌓인 스파이더맨 영화 역사를 되새긴다. 이때 각 인물별로 특화된 서사와 개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런데 여전히 톰이 중심이 되고 토비와 앤드류는 조연으로 활약한다. 이들은 악당들을 싸워 물리치는 대신, 이들을 하나둘씩 설득하려 한다. 때문에 액션은 새롭거나 강렬하지는 않다. 마지막 액션 전까지는 파커의 상실감, 감정적 동요를 다룬다. 팬들을 위해 시각적인 부분보다 유기적인 서사를 짜는 데 더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에선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 영화를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를 꽤 긴 시간 동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소년에 불과하던 피터가 세 번째 영화에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명언을 따라 성장통을 겪고 성인으로 자라난다. 홈 커밍(집으로 돌아오다)과 파 프롬 홈(집에서 멀어지다)에서 노 웨이 홈(돌아갈 집이 없어졌다)으로 가는 게 가혹하지만, 이 또한 스파이더맨의 매력이다. 피터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성장통을 겪고 성인이 됐다.
마블의 수많은 영웅들 중 스파이더맨의 인기는 독보적으로 높다. 이유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처럼 엄청난 재력을 가져서도 아니고, 캡틴 아메리카처럼 꺾이지 않는 신념과 뛰어난 리더십을 가져서도 아니다. 숱한 불행과 고생을 겪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매일같이 악당과 싸우지만 정체를 숨긴 탓에 어떤 특혜도 누린 적이 없다. 일상에선 생활고에 시달리고 학업이나 연애 문제로 패닉에 빠진다. 성격은 착하고 소심하며,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르고 그 탓에 불행에 시달린다. 소시민의 고민을 공유하는 설정은 대중이 스파이더맨을 사랑한 주요 이유로 작용한다. 영웅적 면모만 강조된, 이상적 영웅보다 훨씬 공감돼서다. 그래서 팬들은 피터 파커의 불행이 끊기길 바란다. 집을 떠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의 다음 영화에 기대보다는 응원을 보낸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