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춘향아. 나도 너를 업었으니 너도 나를 좀 업어다오. 아이고! 도련님도. 도련님은 나를 가벼워 업었지만 나는 도련님이 무거워 어찌 업어요? 얘야. 그저 내 양팔만 네 어깨 위에다가 얹고 징검징검하고 걸어 다니면, 그 속에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느니라.”
이 가사는 서도밴드의 <사랑가>라는 곡의 첫 부분이다. 이 노래는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의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현대판 사랑가는 두 남녀가 나누는 사랑의 순간과 짧은 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로 술술 풀어나간다.
업고 놀자며 서로를 구슬리고 어화둥둥 내 사랑을 노래하며, 시간을 멈춰 이 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은밀한 경험 한 자락을 보게 된다.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즐거웠던, 찬란한 한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했을 놀라움과 환희의 순간을 오롯이 공유하고 나면, 이 순간의 미학을 포착한 현대판 사랑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금세 여기에서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춘향가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수백 년간 전해져 오늘날까지 이토록 뚜렷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젊은 남녀가 애틋한 밤을 보내는 것은 본래 흔하다면 흔한 일로 결코 특별하다 할 수 없다. 즉, 춘향가는 평범하고 그저 그런 사랑타령의 하나로 그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춘향가의 서사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 경이로운 밤의 기억이 우리의 평범하고, 어쩌면 보잘것없을지도 모르는 삶을 어떻게든 지탱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챘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내 양팔만 네 어깨위에다가 얹고 징검징검하고 걸어 다니면, 그 속에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다’는 깨달음. 그 대수롭지 않은 기억 속에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는 비밀을 말이다.
어린 두 남녀는 성장의 과정에서 세상으로부터 온갖 고통과 고난, 상실, 좌절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거뜬히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그토록 좋은) 것들이 그 짧은 순간의 기억 속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춘향가의 어린 소녀는 그 밤이 지나자 매몰찬 세상사에 휘말리게 된다.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야 했고, 이후 강압에 시달리며 모진 고문과 고난을 겪게 된다. 요즘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외상으로 규정되는 사건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할 법한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고통의 순간들을 묵묵히 이겨낸다. 어머니의 애타는 소원조차 외면한 채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외압에 꺾이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재기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일까. 세상의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그 밤의 기억이 그녀의 마음속에 시간성을 잃고 영원으로 자리 잡아서였을까. 그날 밤, 평생이 그 밤 같기를 빌었던 그들의 염원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한순간의 기억에 기대어 현실의 고통을 끊임없이 참아내는 삶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말이다. 사실 그러한 삶은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나아가 부적응적인 것일 수 있다. 어찌 보면 현실검증력을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현실의 모든 고통을 외면하고 내면의 논리만을 따른다면, 현실이 제대로 보일 리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춘향가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이들은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 평범하고 짧은 기억의 비밀. ‘그 안’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고, 또한 그 힘이 사람을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지 말이다. 나아가 그 짧은 밤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세상살이를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이처럼 어느 순간의 기억은 고통과 좌절을 무력화시키고 마음속에 간직한 표상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다 다르게 읽어내는 힘을 가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현실인지 구별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이처럼 극명한 모순의 순간과 위대한 힘을 알아차렸던 사랑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여기에서 잠시 눈을 돌려본다. 우리는 사랑가의 소녀로 하여금 고난의 순간들을 견디게 한 그 힘처럼, 혹은 그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어느 기억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저 쉬쉬하면서 잊혀가는, 2021년 어느 여중생의 죽음이 그것이다.
학생 간 성적 접촉이 교실 내에서 발생하였고, 문제가 처리되는 과정에서 한 여중생이 자살을 택했다. 그녀는 과거에도 수차례 자해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성적 문제가 결부된 사건들에 여러 번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어려움은 시간을 돌려 중학교 입학 전,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어느 날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가 벌어졌던, 어느 성인과 성적 접촉이 그것일 것이다. 가해자였던 성인은 짧은 징역형으로 죗값을 치렀고, 그녀는 이후 크고 작은 어려움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마침내 막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 짧은 순간에 벌어졌던 일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가해자의 가족을 꼭 망가뜨려야 했느냐고.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느냐고. 그렇게 큰 사건도 아니지 않느냐고. 다 이해하긴 하지만 왜 아직도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이렇게들 말이다. 그런데 아마도 거기에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사랑가의 그 흔하디흔한 밤의 기억이 눈과 귀를 가리듯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결국에는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의 작은 기억, 수치심, 주위의 시선과 자책감은 멀쩡한 사람의 현실검증력을 송두리째 뒤엎고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몰아가는 무한한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외상은 사물의 지각과 인식 과정을 다르게 한다. 외상을 겪은 이들이 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확연히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다.
사랑가의 찬란한 순간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외상의 순간. 이 둘은 공통점이 있다. 더 이상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힘은 세상을 다르게 지각하고 다르게 해석해낸다. 그러나 전자는 세상의 고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지만, 후자는 고난 속에서 반대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보통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다닌다. 가시적인 지표와 화려한 외양의 추구, 그리고 소위 말하는 스펙 쌓기 경쟁은 간과하기 어려운 현실의 일부이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가에 숨겨진 그 짧은 밤의 위력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상처에 숨겨진 파괴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삶의 또 다른 진실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진실에 가까워지는 일이 찬란했어야 할 순간을 빼앗기고 삶을 포기해야 했던 어린 여중생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떠나보낸 어머니의 두 손을 잡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김은영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