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설명되지 않은 순애보 ‘비와 당신의 이야기’

16:31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다. 뚜렷한 꿈도 목표도 없는 삼수생 박영호(강하늘)는 어느 날 문득 초등학교 동창 공소연(이설)을 떠올린다. 체육대회에서 다친 영호에게 소연이 손수건을 건넨 게 둘의 인연이다. 그런데 소연이 부산으로 전학가게 된다. 소연이 학교를 떠나는 날 영호가 뒤를 쫓지만 둘은 만나지 못한다. 소연에게 관심이 쏠린 영호에게 호감을 주는 건 같은 처지인 수진(강소라)이다. 하지만 영호는 혼자만의 세계에 골몰해 수진을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잊고 지내던 옛 기억에 사무친 영호는 소연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낸다. 역시 꿈을 찾지 못한 채 어머니(이항나)와 함께 헌 책방을 운영하던 소희(천우희)는 언니 소연에게 온 편지를 받는다. 소희는 언니에게 영호의 편지를 보여주지만, 소연은 영호가 누군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소희는 아픈 언니를 대신해 답장을 보낸다. 그렇게 펜팔이 이어지면서 둘 사이에 묘한 감정이 싹튼다. 직접 만날 수 없다는 펜팔의 조건 때문에 둘이 얼굴을 맞댄 적은 없다. 영호는 12월 31일 비가 오면 만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2003년 시작된 영호의 기다림은 2011년까지 이어진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배경은 2003년부터 2011년까지다. 이는 지난 10여년 동안 꾸준히 유행한 리메이크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리메이크는 드라마와 영화, 가요산업에서 꾸준히 인기 있는 콘텐츠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현 시점과 적절한 괴리감이 있으면서도 추억할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시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영화의 장점은 특유의 선의로 가득한 따뜻함이다. 영호는 가죽공방을 운영하는 아버지(이양희)를 도우며 진로를 고민한다. 입시학원을 그만둔 뒤 일본으로 공예를 배우러 떠나는데, 이를 문제 삼는 가족은 없다. 영호는 기약 없이 9년간 소연을 기다린다. 긴장과 분노, 원망을 표현하지만 이내 그 모든 걸 초월한 감정으로 기다림을 수긍한다. 영호의 형 영환(임주환)은 불화를 조장하는 인물이지만, 가족과 갈등은 깊지 않다.

영호를 좋아하는 수진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에게 극성스럽게 굴지 않고 쿨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소희는 엄마를 도와 헌책방을 운영하며 언니 병간호를 자처한다. 소희의 헌 책방에만 머물러 있는 북웜(강영석)은 소희 어머니의 질책을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 따른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 모질거나 되바라지지 않았다. 서정적 소재를 희망적인 메시지로 풀어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천진하지 않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현실감은 전혀 없다. 큰 욕심 없이 순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청춘을 따스한 시선으로만 그려내는 탓에 서스펜스(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이나 독자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를 느낄 수 없다. 영호는 펜팔이 끊긴 뒤에도 대쪽같이 얼굴도 모르는 소연만 오매불망 기다린다. 수진이 애정공세를 펼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수진 외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는다. 소희는 아픈 언니를 극진히 보살핀다. 자신의 미래보다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이게 소희 삶의 전부다.

영화는 영호와 소희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지고지순(至高至純)’은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하다는 뜻의 한자어다. 어릴 때는 이유 없이 이성에게 끌리고 사사로운 욕심도 없다지만, 사회의 때가 묻은 성인의 모습도 지고지순하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는 영호와 소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고작 하나의 반전을 동원한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이 때문에 우연히 시작된 펜팔은 두 사람의 일상을 바꿔놓지 않는다.

영화의 주된 사랑의 형태는 순애보다. 순애보는 눈물샘을 동반한다. 추억과 로맨스를 교직한 정서라면 자연스러운 공감을 이끌어낸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감정에 호소하는 멜로영화다. 문제는 이야기가 단순하고 뻔한 상투성을 내포해 가슴이 아프고 애잔한 이별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조진모 감독은 “관객들이 불완전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의 시절과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의도가 무색하게도 영화는 밋밋하고 애매하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