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세대 보이스 피싱 총책이 경찰에 붙잡혔다. 2012년 필리핀에 콜센터를 개설한 지 9년 만이다. 경찰은 2013년 조직 2인자를 비롯해 간부들까지 모두 28명을 검거했다. 하지만 사기 수법을 설계한 총책은 놓쳤다. 이후 추적은 계속됐고 8년이 지나, 1세대 보이스 피싱 조직 총책과 조직원 7명을 필리핀 마닐라에서 붙잡았다. 검거된 총책은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 전직 경찰이었다.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08년 해임된 뒤 사이버수사 경찰로 근무하며 접한 범죄 수법을 직접 범죄에 이용했다. 보이스 피싱의 대명사로 통하는 ‘김미영 팀장’을 사칭하는 사기 수법은 총책이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의 이번 검거 소식에 큰 관심이 쏟아졌다. 보이스 피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범죄 유형인데다, 총책이 전직 경찰이라는 점이 공분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지만, 영화는 영화답지 못했다. <보이스>는 보이스 피싱 범죄에 대한 영화다. 영화에 나오는 수법은 다양하다.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취준생에게 걸려온 합격 전화, 청약 당첨을 바라는 신혼부부에게 걸려온 당첨 전화, 소상공인 저금리 대출 상담 사칭 앱. 어떻게 범죄가 기획되고, 설계되고, 실행되는지 등 과정이 전반적으로 나온다. 고증에 집착한 탓일까. 서사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시간끌기로 보이는 액션신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한서준(변요한)은 부산의 한 건설현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한다. 어느 날 현장에서 사고가 난 동시에 서준의 아내 미연(원진아)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7,000만 원을 잃는다. 알고 보니 현장소장(손종학)이 보이스 피싱에 속는 바람에 작업반원의 개인정보 전체가 유출돼 벌어진 일이었다. 총 3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고, 미연은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이제부터 경찰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영화는 서준에게 이 역할을 맡긴다. 서준은 전직 경찰이다. 마약수사팀의 에이스인데 국회의원 아들을 건드린 탓에 경찰을 그만뒀다. 극의 전개가 한창일 때 맞닥뜨리는 첫 번째 개연성 문제다. 서준은 사채업자 덕팔(조재윤)에게 쫓기는 깡칠(이주영)을 구해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국내 보이스 피싱 일당에 접근한다. 심지어 이규호 팀장(김희원)이 이끄는 지능범죄수사대보다 앞서 국내 보이스 피싱 알선책 박 실장(최병모)을 만나 경찰로부터 그를 빼낸다. 중국 선양에 있는 보이스 피싱 총책에 다가가기 위한 전략이다. 나중에 경찰에 박 실장을 붙잡을 수 있는 정보를 흘려준다.
서준은 중국 선양으로 넘어가 박 실장을 통해 보이스 피싱 조직 본거지인 콜센터에 잠입한다. 여기서부터 보이스 피싱 범죄 수법이 다시 고증된다. 전화기 앞에 앉은 조직원들은 4인 1조로 나눠 대본에 쓰인 대로 역할을 분담한다. 피해자의 휴대전화는 이미 악성 앱이 깔려 있다. 수사기관 사칭 전화를 받은 피해자가 해당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해도, 전화는 다시 보이스 피싱 콜센터로 연결된다. 조직원들은 형사와 은행 직원, 금융감독원 직원 연기를 넘나든다. 인간성을 상실한 이들은 피해자를 조롱하며 비웃는다. 보이스 피싱의 비인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문제는 서준이 콜센터에 잠입할 때부터 개연성이 크게 뒤틀린다는 점이다. 보이스 피싱 범죄 수법의 고증에 신경쓴 탓인지 서준이 본거지 곳곳을 누비는 게 화면에 잡힌다. 목적은 한국 경찰과 중국 공안이 합작해 말단부터 총책까지 일망타진하는 건데, 영화가 필요 이상으로 보이스 피싱 조직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흐름이 끊기고 짜임새가 흐트러진다. 서준과 보이스 피싱 조직 막내(이규성)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막내는 줄곧 서준을 도와주다가 끝내 배신하는데, 둘의 관계를 묘사하는 서사가 작위적으로 비춰진다. 문제의 근본은 서준에게 있다. 보이스 피싱 범죄 피해자이면서 총책을 쫓는 추적자가 되면서, 서준이 해야 하는 역할이 너무 많아졌다. 그러면서 인물 설정에 오류가 생기고 서사의 빈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영화의 단점은 악질 범죄를 주제로 상세한 면면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은 익숙한 그림으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도입부 설정은 강렬하지만 <보이스>의 등장인물과 과정은 대부분 전에 다 본 것들이다. 역량은 뛰어나지만 억울한 일로 그만둔 전직의 주인공, 공권력을 대신해 적진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영웅, 사고를 당하는 주인공의 아내, 주인공과 범죄로 얽힌 악당, 그 뒤만 쫓는 경찰, 주인공을 돕는 잡범의 코믹한 연기, 비장한 연기에 매몰된 주인공, 범죄조직의 잠입, 주인공과 경찰의 공조로 범죄조직의 일망타진 등이다.
범죄물을 대하는 영화의 진부함은 따분할 정도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그럴싸한 세계를 만들긴 하지만 뻔한 전개에 눌려 상상력은 비좁아진다. 모두 뻔한 범죄형 인물과 이를 대하는 경찰을 보는 건 진력이 났다. 물론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허구를 지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사건이 아무리 드라마틱하다고 해도 현실의 이야기는 다루기가 어렵다. 하지만 실화 모티브의 영화를 장르화하면서 클리셰를 답습하는 것에 그치면 영화적 재미가 떨어진다. 주제는 달라도 범죄물에 고착화되면서 서사가 기계적으로 같아지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영화 자체는 재미있다. 쓸데없는 서사로 뜸 들이는 일 없이 본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긴장감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기계적인 플롯이 존재한다. 피해자인 동시에 추격자가 되는 장르의 공식이다. 장르의 공식을 의식하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현실과 주제 사이에 놓인 날카로운 긴장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떻게 이야기를 꾸려도 장르 공식은 결국 뻔한 결말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은 보이스 피싱 총책 곽 프로(김무열)다. 인간성을 상실한 채 보이스 피싱 철학을 강의하는 그의 말만 기억에 남는다. “팩트체크는 ‘구라’의 기본이야. 보이스 피싱은 공감이야. 무지와 무식이 아닌, 희망과 공포를 파고들어야 돼. 기왕 먹는 거 맛있게 먹어야지. 이 바닥에선 남의 고통을 먹고 사는 건데. 웃어, 즐겨.” 보이스 피싱에 경각심을 느끼긴 하지만, 통쾌한 영화적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