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은 노쇠했다.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62년 <007 살인번호>로 출발해 58년간 25편이나 제작됐다.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냉전은 종식되고, 강대국의 관계는 크게 변화됐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007 시리즈>는 과거를 답습하면서 시대에 뒤쳐졌다. 뻔한 서사는 새로운 숨을 불어넣지 못했다. 패턴처럼 반복해 등장하는 악당은 구태의연하다. 세상을 손에 넣으려는 악당의 음모를 제임스 본드가 저지하는 것 역시 너무 낡고 닳았다. 한물간 영웅의 이야기는 생명력이 다하는 듯 했다. 007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여섯 번째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끄는 <007 시리즈> 역시 우려가 컸다. 첩보원이라는 존재 자체가 시대에 뒤처진 탓에 더 이상 새로울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레이그를 향한 골수팬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배우 숀 코너리와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은 모두 평균 180cm를 넘는 큰 키에 한눈에 봐도 매력적인 흑발의 미남들이었다. 이들은 누구든 쉽게 때려눕히고 여성 편력이 심한 바람둥이였다. 임무에 실패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크레이그는 180cm가 안 되는 키와 금발머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지닌 배우다. 그는 원작 소설의 제임스 본드와 가장 흡사하지만, 영화가 40년 넘게 원작과 다른 모습을 그린 탓이다.
하지만 <007 카지노 로얄>이 개봉한 뒤 모든 우려는 사라졌다. <본 시리즈>가 보여줬던 육탄전에 중점을 둔 액션과 급변한 시대에 어울리는 악당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007 시리즈>라는 평을 얻었다. 수십 년의 전통을 지닌 제임스 본드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특히 <007 스카이폴>은 국가의 폭력으로 인한 희생을 통해 과거를 성찰하고 새롭게 거듭나 호평이 쏟아졌고 시리즈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물론 혹평을 받을 때도 있었다. 거대 비밀 조직 퀀텀과 스펙터와의 구시대적 대결 구도를 그릴 때는 비판이 쏟아졌다.
호평과 비평이 오갔지만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부침을 겪던 <007 시리즈>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런 크레이그는 <007 노 타임 투 다이(007 No Time To Die)>를 마지막으로 제임스 본드와 작별했다.
첩보원을 그만둔 본드는 연인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과 노후를 보낸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혀서일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빨리 갈 필요 없어. 시간은 많아”라며 여유를 부리지만, 길을 걸을 때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과거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다. 과거와 작별하기 위해 옛 연인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의 묘지를 찾은 본드는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매들린이 정보를 유출했다고 의심하며 그와 헤어진다. 직업으로 인해 생긴 의심하는 습관 때문이다.
5년 뒤, 홀로 사는 본드에게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 옛 동료 펠릭스(제프리 라이트)가 일을 부탁한다. 스펙터 일당이 탈취한 영국 대외정보국(MI6) 연구소의 생화학무기와 담당 연구원을 구해달라는 것.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한 본드는 MI6에서 007이라는 코드명을 이어받은 첩보원 노미(라샤나 린치)와 같은 표적을 쫓는다. 총격전 끝에 납치된 연구원과 무기를 확보한 본드는 내부 배신자로 인해 동료 펠릭스를 잃는다. 모든 음모의 배후를 추격하는 도중 본드는 매들린과 어색하게 재회한다. 매들린은 악당 사핀(라미 말렉)과 얽혀 있었고, 사핀은 DNA를 추적해 특정인을 살해할 수 있는 생화학무기를 손에 넣고 인류를 위협한다.
<노 타임 투 다이>는 크레이그가 출연한 <007 시리즈> 다섯 편 가운데 상영시간이 가장 길다. 2시간 43분에 달하는 그의 은퇴 무대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본드와 매들린의 이야기에만 중점을 둬 악당 사핀의 존재감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영웅과 대립하는 악당이 매력적이면 영웅이 돋보인다.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승리하는 이야기가 쾌감을 안겨주는 이유다. 악당이 영웅을 궁지로 몰아넣지 못하면 영웅이 역경과 고난을 딛는 이야기는 감동이 얕을 수밖에 없다. 사핀은 추상적인 말만 반복하며 설득력 있는 모습만 보인다. 사핀의 원한이 <007 스카이폴>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처럼 납득할 수 있었다면 아쉬움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영웅의 은퇴가 아쉽다.
차기 제임스 본드를 맡을 배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많은 배우들이 거론되고 흑인 배우, 여배우도 제시되지만, 설만 나돌고 있다. 2016년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음 007은 여성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성 제임스 본드는) 이제 신선하지 않다”고 말했다. 반대 시각도 있다. 제작자 바버라 브로콜리는 지난해 유명 영화잡지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본드는 어떤 피부색이든 가질 수 있지만 남성이다. 더 강하고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필요할 뿐, 남성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하는 것엔 특별한 관심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007 어나더 데이(2002년)>에서 본드걸로 출연한 배우 할리 베리도 “이 역사적인 시리즈에서 본드를 여성으로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크레이그도 차기 제임스 본드에 대한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나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의 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더 좋은 역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 제임스 본드에 관심이 쏠린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