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추석을 이틀 앞둔 음력 8월 13일 아침, 임병찬林炳瓚(1851~1916)은 교사 밖 일본인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분위기에 눈을 떴다. 그들의 한껏 들뜬 분위기는 의병대장들이 유폐된 학교 건물까지 밀려왔다. 낯선 이국땅에 유폐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면서, 밖의 분위기라도 살필 여유가 생긴 탓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마도 사람들 모두가 이미 열흘 전부터 교사 옆에 있는 신궁에 나와 풀을 뽑고 상인들은 장식용 가건물을 만들어 장막을 두르고 있었다. 색칠한 등과 종이로 만든 꽃들도 여기저기 걸어 화려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임병찬의 생각에 문화는 다르지만, 이들 역시 추석을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모습을 갖추어 가는 달을 보며, 유폐된 의병장들은 하나같이 고향에서의 추석이 그리워지던 터였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야 조선과 대마도가 다를 리 없을 터이니, 그리운 마음을 담기에도 좋았다. 통역하는 이에게 물어보니, 대마도에는 하치만궁[八幡宮]이라는 무운武運을 비는 신사神社가 있어서, 이곳 사람들은 추석만 되면 여기에서 큰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즐긴다고 했다. 음력 8월 13일부터 보름달이 뜨는 15일까지 3일간 지속하는 축제로, 이 기간에 대마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업을 잠시 멈추고 떠들썩하게 모여 논다는 것이었다.
오후에 미자와 소우지[三澤曾治]가 추석 인사차 유폐된 의병장들을 찾았다. 이 사람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유배된 의병장들의 충의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추석에 대한 추억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까지 소환하고 있던 터라, 이들의 추석 축제를 통해 잠시 위로라도 얻을 요량으로 미자와에게 축제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미자와는 붓을 들어 하치만궁에서 이루어지는 추석 축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내용을 본 임병찬은 다시금 쓸쓸한 심정을 감출 길 없었다. 이들이 8월 보름달을 보면서 즐기는 축제에도 그들의 한반도 침략 역사가 녹아 있었다.
하치만궁에서 매년 8월 보름에 벌어지는 축제의 이름은 하치만제라고 했다. 하치만궁은 한반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는 군인들의 무운과 승리를 빌기 위해 세운 신사로, 미자와의 필서에 따르면 옛 천황의 후궁 가운데 한 명이 삼한三韓, 즉 한반도를 정벌하기 위해 세웠다고 했다. 실제 일본에서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노략질할 때 지리적 여건상 대부분 대마도를 이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섬이었기 때문에, 침략이나 노략질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대마도에는 한반도 침략이나 정벌 관련 기록이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하치만제 역시 그러한 풍습이 당시까지 축제로 남아 이를 기념하고 있었다.
미자와가 말한 천황의 후궁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한반도를 향한 출병 준비가 모두 끝난 후, 대마도에 신당을 만들고 승리를 기원하는 히치만제를 3일에 걸쳐서 지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 기간 병사들 모두는 떠들썩하게 먹고 즐기면서 출병을 앞둔 긴장감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면 모두 바닷가에 나아가 마지막 제사를 지내는데, 아마 출병 당시라면 이렇게 보름달이 뜬 날을 선택해 실제 출병을 했을 것이다. 당시 대마도인들이 열흘을 넘게 준비해 온 추석 축제가 한반도 침략의 승리를 기원했던 히치만제에서 유래했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본 추석의 밝은 달이 풍성한 가을과 추수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당시 그들 위에 뜬 보름달은 침략자들의 바닷길 안내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마도에 유폐된 의병장들은 주로 을사조약에 강하게 반발했던 호서와 전라 지역 의병장들이었다. 최익현崔益鉉(1833~1907)과 임병찬 등을 포함한 다수 의병장이 1906년 7월 8일 부산항을 떠나 대마도에 유폐됐다. 이들의 유폐 계획은 영국이 이집트를 식민지화할 때 정책을 모방한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 영향력이 컸던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이를 통해 이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통감으로 왔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직접 계획하고, 한국의 통감부가 전면에 나서 진행했던 계획으로, 그 뒤에서는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일본 육군성, 그리고 내각까지 협조했다. 의병장들에 대한 대마도 유폐가 조선에 대한 강제점령을 위한 것이니만큼, 이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 역시 얼마나 엄중했을지 짐작할만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의병장들이 맞은 이국땅에서의 첫 번째 추석이 대마도의 하치만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추석날까지 3일간 지속한 축제 열기는 먼발치에서도 느낄 정도로 떠들썩했다. 밤하늘에는 별빛과 달빛이 이들 축제를 축하하는 듯했고, 축제장에서는 온갖 꽃장식과 촛불들이 그에 화답하는 듯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축제였지만, 유폐된 의병장들 입장에서는 그립기만 했던 보름달마저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라를 잃어가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지만, 그래도 고향에서는 잠시 저 달을 보면서 풍요로운 추석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떠 있는 보름달은 하치만제의 정점을 상징하면서, 한반도로 떠날 일본 군사들을 비추고 있었다. 결국 의병장들은 서로의 아픈 마음을 시로 달래려 했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달래질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반도 침략에 맞서 싸웠던 의병장들이 맞은 낯선 이국땅에서의 추석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 침략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미 삼한시대부터 이 축제를 통해 한반도 침략의 승리를 기원해 온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 당시 조선의 상황은 하치만제의 기도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바닷길을 밝혀주던 8월 보름달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제 점령을 밝혀주고 있었으며, 패한 조선의 의병장들은 먼 이국땅에 유폐되어 추석에 대한 그리움마저 그들의 축제에 빼앗기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제 너무나 일상적인 추석을 맞고 있지만, 이들은 이를 위해 추석의 밝은 달도 올려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추석날 밝은 달을 올려다보면서, 잠시라도 이들의 노력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