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넘치는 혈기를 감당하기 버거웠던 시절, 그런 나를 제목만으로 간단히 압도하였던 소설이 있었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그것이다. 당시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화제가 되었던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제 가물거린다. 아마도 여성들에게 남성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는 죄목으로, 남성들의 폭력에 깊은 분노를 가진 젊은 여성이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를 납치하여 길들인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때에는 독자들에게 골고루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만, 지금이라면 일부 남성의 상당한 분노를 유발하는 소설일 수도 있겠다.
내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요즘, 나는 줄거리조차 가물거리는 오래된 소설 제목을 어색하게 되뇌이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의 중심도시 뉴욕이 ‘코드 레드’ 수준의 기후위기 상황과 직면하고, 빚더미에 시달린 젊은 자영업자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슬픈 시대에 맞이하는 대통령선거의 상상 결핍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족이 그것이다.
‘정초선거(定礎選擧)’라는 것이 정치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의미하고, 다소간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우리나라에서 실시되는 대부분의 선거는 정초선거라고 불릴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 평화적 저항을 통하여 강고하게만 보였던 지배블록을 일순 무너뜨렸던 ‘촛불’이 탄생시킨 정치권력의 연장 여부를 결정하여, 향후 한국사회의 중장기적인 방향을 가늠하게 될 차기 대통령선거도 정초선거라는 명칭을 부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까지 대통령선거 분위기는 진영의 안위와 상호 신변잡기적인 네거티브가 지배하고 있다. 더욱이 평소에는 종종 도발적인 주장을 표출하는 시민단체의 상상력이 선거를 앞두고는 늘 그러하듯이 각자의 진영논리로 순치되고 있다. 한편으로 ‘촛불정부’는 ‘불공정의 정상화’를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이것의 심화에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면서 ‘보수의 보수화’도 ‘진보의 진보화’도 자승자박(自繩自縛)과 아전인수(我田引水), 말하자면 스스로를 가두면서 지체되고 있다. 이를 비판할라치면 ‘양비론’이니 ‘선비질’이니, 힐난이 빗발친다.
이처럼 광장의 상상력이 진영의 안위에 질식되고 있는 차기 대통령선거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족은 마치 조건반사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오래된 소설의 제목을 소환하였다. 말하자면 노동과 생태, 기후와 혐오 등과 같은 마땅히 제기해야 할 시대적 의제를 현실적 제약을 구실삼아서 회피하고 있는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만족이 나를 젊은 시절에 경험하였던 압도적인 기억으로 안내하였다.
당분간 지금의 상황은 쉬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사태와 서서히 드러나는 기후위기의 파국적인 상황, 한편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와 근본도 없이 번져가는 혐오와 차별이 주조하는 시대의 살풍경은 더욱 풍부한 정치적 상상으로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제20대 대통령선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상황이 그러하기에, 차기 대통령선거는 흔들리는 미래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절박한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치의 에누리도 없는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는 여야 정치권에서 지금껏 빈번하게 목격되는 장면은 위기에 대응하는 반짝이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추수하는 기민한 셈법이다. 소위 ‘촛불정권’을 연장하려는 ‘진보 여권’은 장내를 정리하기에도 힘겨워 보인다. 실제로 실패를 반복하던 정부와 여당의 부동산정책이 최근 결정적으로 후퇴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기실 4월 보궐선거에서 패배를 경험한 이후, 여당은 금융정책으로 부동산투기를 억제하던 기존의 정책적 방향을 변경하여 대출 규제를 완화하였고, 시가 12억 아파트의 세금도 줄였다. 그러면서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의 조정 가능성도 내비쳤다. 한편으로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의 성과를 강조하는 정부에 대하여, 일부 시민단체는 ‘문재인케어의 실패’를 선언하였다. 코로나 사태를 빌미로 의료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정부의 지난 몇 년간 의료보장률은 1.5% 증가에 그쳤으며, 오히려 보험료는 2.5배 인상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외에도 산업재해가 없는 안전한 사회를 지향한다면서 여권이 강력하게 추진하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기업의 부담을 고려하여 ‘기업’을 생략한 상태로 통과되었다. 정부의 국민지원금 선별지급으로 인하여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는 최근의 민망한 상황은 언급하지 않겠다.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보수 야권’도 크게 다르지 않다. MZ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30대 초반의 나이에 제1야당 대표가 된 젊은 정치인은 청년의 참신한 상상력보다는 ‘젊은 꼰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이며, 소위 ‘젊은 꼰대’는 자신이 또래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면서, ‘늙은 꼰대’를 극도로 경멸하는 동시에 자신이 하는 모든 꼰대짓에 ‘진심’을 담는다는 어느 블로거의 날카로운 분석이 얼추 맞는다면 말이다. 바로 그 정당에서 대통령후보 지지도 1위와 2위 자리를 넘나들고 있는 ‘늙은 꼰대’ 후보는 국회의원의 정수를 200명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를 폐지하겠다는 참으로 괴이한 상상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최근 <시사IN>은 ‘한국인이 분노하는 다섯 가지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것은 ‘약자혐오 사회에서 국가의 인권보호 방기’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혐오’, ‘권력화된 이익집단에 대한 공권력의 무기력한 대응’, ‘평등과 공정에 대한 사회 구성원 간 인식 충돌’,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인식 및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관념의 변화와 이에 따른 충돌’이다. 이것들이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분노의 과녁이자, ‘문제적 일상’의 단면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받지 못한 국내 거주 조선족과 중국인들의 ‘거센 불만’과 이에 대한 한국 국적인들의 비난을 세세하게 중계하면서, 애써 혐오를 조장하는 어느 유력 찌라시의 노력은 무시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이러한 현실은 상상보다는 여러모로 분노와 어울린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할수록 분노의 시간을 넘어설 상상의 복원이 필요하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것’(영화 <올드보이>의 대사)이라는 협박보다는, 브라질의 제35대 대통령 룰라(Luiz Inácio Lula da Silva)가 자신의 대통령선거 당시 캠페인 구호였던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라는 격려일 것이다.
리얼리스트일지라도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은 가질 수 있는 법이다. 더구나 대통령선거 국면이다. 현실 너머의 상상이 필요하다. 이 종교 저 인종, 이 성향 저 이념이 서로 투닥 투닥 살아가는 사회, 노동의 결과가 삶의 보람으로 우리 네 인생을 든든히 받쳐주는 사회, 자연을 위하여 인간의 편리함을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그야말로 자연스러워지는 사회, 헌법에 명문화된 지방분권의 권리가 대한민국 전체에서 일상적으로 구현되는 사회···.
이런 상상은 어떨까? 시민의 삶이 집값으로 인하여 좌절당하지 않는 사회. 이를 테면 현재 대다수 국민을 절망하게 만드는 부동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개인 자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빈부의 격차를 가속화하고 있는 부동산에 대한 공적 통제를 확보하는 정치적 행위, 예를 들면 부동산 기업의 국유화 여부를 결정하는 시민투표의 시행 같은 것이면 어떨까? 이런 시민투표에서는 3천 개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부동산 기업의 주택을 국유화하고, 국유화한 주택 관리는 공기업을 통해 이윤이 아닌 공익에 따라 운영하며, 주택 관리는 직원들과 세입자 및 당국이 다수결에 따르는 민주적 방식에 따른다는 규칙 등이 주요한 결정 사안으로 설정될 것이다.
더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라는 지청구를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시민투표가 올해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실제로 실시된다. 결과를 떠나서 놀라운 시도이지만, 그 결과가 상당히 궁금하다.
채장수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