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사회운동가 이소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내가 못다 이룬 일, 끝까지 해 주세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운동가가 된 이소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소선 운동가 10주기에 대구 전태일 열사 옛집에 모였다.
3일 오후 4시 30분 대구 중구 남산동 전태일 열사 옛집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 이소선을 기억하다’ 이소선 운동가 10주기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사장 이재동)이 주관하고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성서공동체 FM, 뉴스민,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가 공동 주최했다.
행사에 참석한 송경동 시인이 기억하는 이소선 운동가의 마지막 모습은 병상에 누워서도 영도조선소 85번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는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던 모습이었다.
생의 마지막까지 투쟁하는 노동자를 보살피려 했던 이소선 운동가. 그는 85번 크레인을 찾겠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1년 9월 3일 82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전태일 열사 옛집에서 마이크를 쥔 송 시인은 “사상의 거처에 온 기분”이라고 했다.
“한진중공업 희망 버스 하면서 내가 수배당하고 있을 때 (이소선 운동가는) 병원에 계셨습니다. 사투하면서도 김진숙을 살리러 가야 한다고 해서 많이 말렸어요. 돌아가시고 나서 영정을 한진중공업 크레인 아래까지 모셔 갔습니다. 이곳에 오니 사상의 거처에 온 기분입니다. 소중한 공간을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송경동 시인)
송 시인은 <뉴스민> 기자에게 “촛불 정권이라는데, 지금은 민주노총 위원장을 방역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이재용은 여러 혐의가 있는데도 가석방을 하는 세상이다”며 “(대선 후보들도) 빈말이라도 좀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가기 위한 공약 하나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안타깝다. 이소선을 기억한다는 건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동 이사장은 “10년의 세월 동안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민주화도 되었지만 사회적 모순은 언제나 있다. 잠재돼 있고 더 교묘한 형태의 불공정이 있다”며 “이소선은 30대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여섯 식구가 셋방에서 살았다. 이 시기를 전태일 열사는 가장 행복한 시기로 회상한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곳을 매입해 보존한 것도 아름다운 일. 어머니와 아들의 뜻을 이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행사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배우자인 김혜경 씨도 참석했다. 김혜경 씨는 “이소선 어머님의 연대와 나눔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방명록에 썼다.
기념행사 이후 영화 ‘태일이’ 제작 협약식도 열렸다. ‘태일이’는 영화제작사 명필름에서 제작하는 에니메이션으로, 11월 개봉 예정이다. 협약식에는 명필름 이은 대표, 양기환 질라라비 대표가 참석했고 대구 시민제작위원 대표로 이승렬 영남대 교수도 참여했다.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이날 저녁 7시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대구인권교육센터로 자리를 옮겨 공연과 강연회도 열었다. 극단 함께사는세상이 창작한 연극 ‘어떤 약속’ 공연 이후 ‘전태일·이소선 기억을 기록하다’ 저자인 김대현 문학평론가가 이소선 운동가의 삶과 정신에 대해 강연도 열었다.
4일에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이소선 운동가 기념 특별 영화 상영회도 예정됐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가, 오후 1시 30분부터는 김경식·나카오 순이치로 감독의 극영화 ‘어머니-분노가 타오른다’가 상영된다.
전태일기념관에 따르면 이소선 운동가는 1929년 1월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근로정신대로 대구 칠성동 방직공장에서 강제노역했고, 남산동에서 봉제 공장을 하던 전상수 씨를 만나 결혼했다. 1948년 8월 전태일 열사를 출산했고, 한국전쟁 시기 부산~서울을 오가다 1960년 대구로 왔다. 이소선 운동가는 2남 2녀를 보살피기 위해 생업에 몰두했는데, 1970년 전태일 열사에게 근로기준법을 배우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는 그해 11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 항거했다.
이후 운동가로 거듭난 이소선 운동가는 11월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에 관여했고, 1975년 근로시간 단축 농성, 1976년 동일방직 노조 탄압에 맞선 연대 투쟁, 1977년에는 법정모독죄 구속과 실형 선고로 옥고를 치렀다. 1979년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 연대, 1980년 계엄령 위반 수배, 19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수감과 징역 1년 선고, 1981년 청계피복노조 강제 해산에 저항하다 징역 10월 선고 등을 받았다. 이소선 운동가는 이외에도 대우조선 이석규 장례투쟁, 한진중공업 김주익, 곽제규 장례 투쟁, 용산참사 현장 연대 투쟁 등 무수한 투쟁 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했다.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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