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내가 대표한다.” 촛불 광장을 뒤흔들었던 구호다. 촛불 당시 전국적으로 연인원 1,700여만 명이 촛불 광장을 메웠다. 또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75~80%에 달하는 국민이 촛불을 지지했다. 전례 없는 촛불연합이 형성된 것이다. 국민이 공적으로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한 신가산제1의 속살을 목도한 국민들이 촛불항쟁을 통해서 부패한 권력자를 몰아냈다.
이후 촛불을 통해서 오롯이 국민의 힘으로 정권은 교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촛불 혁명’, ‘21세기 명예혁명’으로 찬사를 보냈다. K-방역 이전에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한 K-Democracy(K-데모크라시)가 있었다.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원칙을 공유하는 민주적 우파(오른손잡이 민주파)와 민주적 좌파(왼손잡이 민주파)가 민주주의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했다.2
하지만, 촛불이 타오른 지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촛불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촛불로 탄생한 자칭 촛불 정부를 반대 진영에서는 ’의회독재‘ 심지어는 ’연성 파시즘‘으로까지 비난한다. 촛불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촛불 연합은 해제됐다. 이에 따라서 한국 정치의 특징이었던 여야 간 극심한 대립과 비토크라시(vitocracy)3는 일상화되었다. 촛불광장에서 타올랐던 민주주의는 촛불 정부에서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었다.4 광장에서 주권재민의 순간을 만끽하며 분출하던 열광의 순간과 이후 빠르게 찾아온 실망의 지속이라는 패턴이 한국 민주화 30년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왜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나?
2.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는 수많은 정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인민들이 대표자들을 선출하여 주권을 위임하고 자신의 선호를 실현하는 체제라는 데에는 대체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 이상이 구현하는데 중요한 제약을 가진다.
주권자인 인민이 권력을 위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대표의 편향, 나아가 실패가 발생한다. 정치적 대표의 편향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의 투입 과정과 정책의 산출 모두에서 발생한다. 인민들은 대표자의 선출 과정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최적의 대표자(대리인)를 선출하는 데 종종 실패한다. 또한 대표자를 선출한 이후에도 대리인인 대표자가 주인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는지 완벽히 감시할 수 없다. 따라서 다음 선거에서 대표자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산출(정책) 수준에서 정치적 대표의 편향은 더 자주 발생한다. 현실에서는 인민들의 이해보다는 큰 영향력을 가진 특별이익집단의 이해가 더 쉽게 반영된다. 민주주의 정책의 결과가 특정한 집단을 더 과대대표하게 되면 대표의 편향을 낳고 나아가 불평등한 민주주의로 귀결된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가 증가한다.
3.
촛불 항쟁을 통해서 탄생한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 한국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 경쟁적으로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교체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선거제체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한국은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룬 소수의 사례이다. 민주화 30여 년 동안 일곱 번의 대통령 선거와 아홉 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안정적으로 치렀다. 이 과정에서 세 번의 정권교체를 큰 잡음 없이 이루어냈다.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이라는 마을에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 된 것이다. 미안마와 태국의 사례가 상징적으로 나타내듯이 게임의 규칙의 민주적 제도화는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 속살은 이러한 성취와는 사뭇 다르다. 민주화 과정에서 다수제적 선거제도와 결합된 중앙집권적 대통령제가 제도화되었고 지역정당 체제가 결빙되었다. 다시 말하면 승자독식 체제가 제도화된 것이다. 이 체제는 대통령직에 대한 보상을 극대화하여 내부에서는 이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만들어냈다. 이와는 반대로 이 체제는 높은 진입 장벽을 만들어내 이미 기득권 시스템 안에 진입한 ‘인싸’(insider)와 진입 장벽에 걸려 좌절하고 있는 ‘아싸’(outsider)’ 사이의 구별짓기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부상하게 했다. 글쓴이는 이러한 체제를 위계적 카르텔 체제라고 본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지만 이러한 체제는 정치적 대표의 편향과 실패를 낳았고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요사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청년 대표의 문제를 통해서 이를 간단히 살펴보자. 21대 국회에서 20대 선거인 수는 전체의 18.1%(794만 명, 18~19세 포함)에 달했지만 국회의원 수는 단 2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의원 300명 중에서 1%에도 못 미쳤다. 범위를 30대까지 확장해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30대는 선거인 수의 15.9%(699만 명)를 차지했지만 국회의원 수는 11명으로 전체 의원 정수의 3.6%에 지나지 않았다.
정책 결과를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16대~20대 국회 시기까지 통과된 법안 총 1만 2,150건 중에서 청년 정책 관련 법안 발의는 115건(0.09%)에 지나지 않았다. 통과된 법안 건수는 8건에 그쳤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청년 대표의 실패는 사회경제적 결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노인 빈곤은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었지만 청년 빈곤은 이슈조차 되지 않는다. 민주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도 청년 빈곤은 오히려 심화됐다. 2006년 16.7%였던 청년 1인 가구 빈곤율은 2014년 21.2%까지 상승했다.
4.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소가 250여 년 전에 말한 것처럼 선거 때만 자유롭기 때문인가? 하지만 민주주의는 주인의 주기적인 교체에 머무를 수 없다. 더구나 어느 시인이 일갈했던 것처럼 대통령 하나 바꾸자고 시민들이 광장을 촛불로 메운 것이 아니다. 이미 기득권화된 위계적 카르텔 체제로서 한국 민주주의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참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시작할 때다.
강우진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