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신발장 바로 앞에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문을 열자마자 마구 던져놓고 어디론가 나가버린 모양이다. 종종 내 잔소리의 대상이지만 자식이 곁에 있다는 사랑스런 흔적이기도 해 그냥 웃고 만다. 중3인 큰애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간 아이는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봄날
나도 중간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영진고등학교 3학년생인 나는 하교하자마자 책가방을 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때로는 집에도 안 가고 무거운 책가방을 그대로 둘러맨 채 동인동 경북대 의과대학 앞마당으로 달려갔다. 혼자는 아니었다. 학교 민주화를 위해 비밀 소모임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모임을 함께 하던 2학년 후배들도 같이 그 캠퍼스 마당에 섰다.
햇살이 뜨거워지던 5월이었다. 나흘씩이나 시험을 치르던 중간고사 기간 내내 우리는 점심 무렵부터 쏟아지는 최루탄을 피해 짱돌을 던졌다. 그렇다고 대학생 형들을 따라다닌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하나의 대오를 조직적으로 이룰 만큼 성장했고 정치적 주체로서 이 항쟁에 기여하고자 했다. 우리 학교만이 아니라 적어도 열다섯 개 이상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치열하게 싸워나갔다.
출정식이 열리던 동인동 캠퍼스였다. 군사독재정권 치하였으니 야당도 이 투쟁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선 야당의 연사는 연설을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 보수야당 물러가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울분을 토하며 야당도 함께 하겠다고 외쳤으나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대오는 재빠르게 공평네거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혈기 넘치는 고등학생 대오도 맨 앞에서 싸우기를 자청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5월. 최루탄 총과 곤봉을 든 전투경찰의 무리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최루탄 연기로 가득 찬 거리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행인이 쓰러지든 말든, 토끼몰이에 걸려 두들겨 맞은 시위 참가자가 피를 흘리든 말든 또 어디론가 주체할 할 수 없는 살기(殺氣)를 띤 채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하지 않았다. 경찰의 정보원보다 한발 앞서 신출귀몰했고 시민의 박수 세례를 받으며 도심을 휘저었다.
시위는 해 질 무렵에나 끝났다. 매캐한 거리에서 누군가가 동료의 목마를 타고 올라와 내일의 투쟁을 기약하자는 연설을 했다. 당시 경북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안영민 선배였다. 때로는 경북대 야외공연장에서 정리 집회를 할 때가 있었는데 사회자가 수고하셨다며 참가 대학들을 호명할 때 우리는 일제히 소리쳤다. “여기, 고등학생 대오도 있습니다.”
1989년, 전교조 세대가 되다
1989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5월, 학원과 사회를 강타한 전교조 결성 사건을 겪으며 혼란스런 시대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사회 갈등을 외면했다. 시문학동인회 동아리에 들어간 친구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권했을 때 괜스레 김동리의 단편집 <무녀도>를 집어들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 테이프를 샀다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흥얼거릴 때 일부러 ‘소지로’의 <대황하>를 들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 시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던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해직의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인근 학교에서는 전교조 탈퇴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수 교사가 잘려나갔다. 그리하여 ‘선생님 지키기 투쟁’이 시작되었다. 6월이 되자 교실보다 운동장에 나갈 일이 점차 많아졌다. 이제 나도, ‘우리’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교조 세대가 되었다.
이후 우리들은 ‘선생님 지키기 투쟁’을 넘어 ‘학교 민주화 투쟁’의 주체로 성장해 나간다. 학년별 비밀소모임이 만들어졌고 학생회장 직선제 쟁취를 목표로 학생 자치권을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치열하게 벌여나갔다. 영진고등학교의 ‘10월 18일’의 거사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얀 봉투의 주인공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누군가가 부르는 약속된 호각소리에 맞춰 학생 1,300여 명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참교육을 실현하라’, ‘학생자치권을 보장하라’ 외치며 스크럼을 짰고 <아침이슬>을 부르고 연좌를 했다. 조용하게 학력고사를 준비하던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한 나에게 퇴학시킨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투쟁을 지휘한답시고 처음으로 일주일을 가출해 경북대 사범대 학생회실에 머물렀는데 사실 몹시도 힘겨웠다. 우리의 투쟁이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누군가가 하얀 봉투를 전달해왔다. 어떤 고등학교의 비밀소모임에서 모아준 투쟁기금이었다.
마음이 짠했다. 한두 학교가 아니었다. 투쟁기금 봉투는 매일 밤 전해져왔다. 경상고, 성광고, 대구공고, 영신고, 성화여고, 신라여고, 경명여고, 경화여고, 경덕여고, 제일여상, 대구고, 협성고, 혜화여고, 경원고, 송현여고, 덕원고···. 하얀 봉투에 적힌 학교 이름을 보며 다시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두렵고 힘겨운 마음을 이겨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고 보름여가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승리했다. 학생회장 입후보 자격인 성적 제한은 극소수 상위에서 대폭 완화되었고, 의견 수렴 기구에 불과했던 학생회의 의결권은 부분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나와 함께 동료 3명이 받은 무기정학은 철회되었다.
1989년과 1991년 그리고···
그때 투쟁기금을 모아준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곧 1991년 5월 투쟁의 한 축이었다. ‘선생님 지키기 투쟁’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민주적인 학생회 활동을 탄압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하며 투신한 故김수경 열사(1990년 당시 경화여고 3학년)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더욱 결집했고, ‘새벗청소년도서원’과 ‘열린교실’을 통해 하나가 열을, 열이 백을 만드는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우리에게 그해 5월의 항쟁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단련의 학교였으며 연대의 가치관을 심어준 용광로였던 것이다.
매일 같이 들려오던 열사의 분신 소식에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같은 고등학생이었던 故김철수 열사(1991년 당시 전남 보성고 3학년)의 분신 소식까지 들리던 때였다. 승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새도 없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집에도 안 가고 가방을 둘러맨 채 거리에 섰던 나에게, 우리에게 5월은 그저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의 함성이 데우는 그 뜨거운 열기의 한복판에 있었을 때 우리는 가장 인간적이었다.
2021년이다. 벌써 40대의 마지막이다. 누구는 죽음의 굿판이라 저주했고 또 누구는 실패한 투쟁이라 비평한다고 해도 나 하나가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너의 삶이 되어 함께 더 나은 내일을 열어나가자는 그날들의 뜨거웠던 약속만큼은 살아 있다고 믿는다.
30년 전 몰려오는 독재정권의 군홧발을 피해 손 꼭 잡고 거리를 누볐던 많은 고등학생 동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일선에 땀 흘리며 활약하고 있다. 서 있는 곳은 달라도 따뜻한 인간의 사회를 열기 위한 연대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1991년 5월 투쟁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믿는다. 비록 변하지 않은 오늘의 고통 앞에 때로 절망할지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송영우 진보당 대구시당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