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玆山魚譜)>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지식인 자산 정약전(1758~1816)이 지은 어류백과다. 그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814년 집필을 마쳤다. 조선 후기 학자 김려가 1803년 지은 국내 최초 어류학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와 함께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 수많은 수산동식물의 이름·분포·형태·크기·습성·쓰임새 등이 기록된 이 책들은 지어진 목적은 백성들을 위해서다. 하지만 당대 문신들이 어보를 집필하게 된 까닭은 정치적 탄압 때문이다.
정약종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정조 승하 뒤 왕위에 오른 순조 1년(1801)에 벌어진 신유박해는 형제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다.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을 위협하는 서학(천주교)을 섬긴다는 이유로 정약종은 참수당하고, 정약전, 정약용은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난다. 김려 역시 유배된 진해에서 <우해이어보>를 집필했다. 귀양살이는 이들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주면서도,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됐다.
<자산어보>는 정약용보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은 정약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약용은 귀양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약전은 귀양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영화는 정약전이 <자산어보> 서문에 남긴 대목에 작가의 상상을 더해 만들었다. 서문에는 ‘섬 안에 창대, 장덕순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은 탓에 식견을 넓히지 못했다. 그러나 성품이 신실하고 정밀해 물고기와 해초, 바닷새 등 모두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그 성질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그리해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사실 정약전은 풍랑으로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 마카오, 중국까지 떠돌다가 우이도로 간신히 돌아온 홍어 상인 문순득(1777~1847)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흑산도에 들른 문순득이 정약전에게 표류한 사연을 들려줬고 정약전은 그의 이야기를 날짜별로 정리해 <표해시말>이라는 책을 지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 그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극진히 장례를 치러줬다.
정약용은 훗날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여환(呂還)이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형의 장례를 치러준 것에 대해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자산어보>의 주제가 바다 생물 사전 집필기가 아니라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부패상과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좌절하는 혁명과 개혁이라는 점에선 정약전과 창대의 이야기가 어울린다.
영화에서 정약전과 창대는 지식을 나누는 스승과 제자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립한다. 창대는 조선의 봉건질서를 지탱하는 성리학을 신봉한다. 이 때문에 서학을 받아들여 수평 사회를 꿈꾸는 정약전과 갈등을 겪는다. 정약전이 지닌 급진적 사상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순응하며 입신양명을 꿈꾸는 창대가 받아들일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어느 한 편만 두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상주의를 충돌시키지만, 균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틀리다고 재단하지 않는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교훈을 던져준다. 이준익 감독은 언론인터뷰에서 “동주든 약전이든 창대든, 모든 개인은 시대와 불화를 겪는다. 이겨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약전, 약용, 창대의 대비 속에 고루 다른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자산어보>는 흑백으로 촬영됐다. 흑색·회색·백색의 스펙트럼으로 표현한 영상은 수묵화를 보는 듯 운치 있게 느껴진다. 정약전의 술상 너머 보이는 섬의 산세와 윤슬이 반짝이는 망망대해는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설경구와 변요한, 이정은, 조우진 등 배우들은 호연을 펼친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