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는 결혼식 만들고 ‘갑질 계약서’에 우는 웨딩플래너

웨딩컨설팅 업체 소속 웨딩플래너의 현실
출퇴근, 업무 보고 등 업체 관리·감독
근로 관계 성립하지 않는다는 계약서 써
대법원, "웨딩플래너 근로자성 인정"

15:26

결혼식 한 시간 전, 예비부부가 웨딩홀에 도착한다. 메이크업, 드레스와 턱시도를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웨딩홀 세팅을 마무리하고, 사회자, 주례자가 도착했는지 확인한다. 신랑, 신부가 무사히 식장에 입장하는 걸 보고 자리를 뜬다.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결혼식이 모두 마무리됐다. 이제 결혼식(본식) 사진만 나오면 임무는 끝난다.

웨딩홀, 청첩장,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혼수, 예복, 예물, 신혼여행···. 예비부부가 결혼식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을 함께 준비하는 사람, 바로 웨딩플래너다. 결혼 날짜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하고, 고객과 업체를 연결해 계약을 맺어 준다. 결혼박람회를 통해 계약하는 고객에게는 회사에서 준비한 사은품을 주거나, 추가 할인 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10시 출근, ??시 퇴근
주 5일 근무, 연차는 1년에 3일

웨딩플래너 김소정(가명, 35) 씨는 오전 10시가 되기 전 출근한다. 웨딩컨설팅 업체다. 근무 시작 전에는 청소를 한다. 업무 시작 전 얼굴 메이크업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업무 일지를 쓰고 일을 시작한다. 결혼식이 없는 평일에는 사무실에서 회사 제휴업체 중 고객이 원하는 기준에 맞는 업체 목록을 추리고 상담 준비를 한다. 직장을 다니는 고객이 대부분이라 오후 6시 이후에 주로 상담을 한다. 출근은 정시에 맞춰서 했지만, 퇴근 시간은 무의미하다.

상담이 없다고 마냥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회사에서 정해준 계약 실적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웨딩박람회도 기획해야 하고,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SNS 업로드도 해야 한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일지를 쓰고,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퇴근할 수 있다.

외근 일지는 더 꼼꼼하게 써야 한다. 외근 장소, 시간, 만나는 사람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잘못 썼다가는 회사에서 확인 전화가 오기 때문이다. 고객과 함께 제휴 업체 미팅 중인데 상급자가 제휴 업체로 확인 전화가 온 적도 있다. 현장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플래너들은 이를 “단속을 당한다”고 표현한다.

주말에는 항상 예식이 있어 평일 이틀을 쉰다. 여름휴가 3일이 1년 중 유일한 연차다. 소정 씨는 “웨딩플래너가 출퇴근 관리를 엄격하게 받고, 연차도 없이 이렇게 일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못 할 거다”고 말했다.

▲’대구 웨딩박람회 일정’ 홈페이지 갈무리

“근로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계약서
근로관계는 아니지만, 시키는 일은 해야 한다

회사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했고, 회사가 지시하는 일을 하면서 실적을 채우지 못했을 때 불이익도 받았다. 신입 때 기본급 60만 원에서 시작해 퇴사할 때 기본급은 70만 원이었다. 승진할 때마다 기본급이 조금씩 올랐다. 출퇴근 시간이 엄격했지만 연장 근무 수당은 없었다.

웨딩플래너의 주요 수입원은 ‘인센티브’다. 플래너가 고객과 업체의 계약을 성사시키면, 회사가 그 계약금을 일정 비율로 나누어 주는 방식이다. 회사에 고용된 여느 직장인처럼 일했지만, 임금은 프리랜서처럼 받았다. 프리랜서처럼 4대 보험도 없고, 퇴직금도 없었다. 그마저도 입사 직후에 계약이 없는 동안에는 100만 원도 안 되는 기본급으로만 버텨야 한다.

이렇게 이상한 방식이 통한 것은 ‘계약서’ 때문이다. 플래너들은 웨딩컨설팅 업체와 근로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계약을 맺는다. 이런 내용의 계약서를 요구하는 업체가 적지 않다.

“···’갑’과 ‘을’ 간에는 ‘근로기준법 및 기타 관련 법률상 근로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플래너 계약서’에 서명한 사실이 인정된다···”  – 대구지방법원 제2-2형사부(재판장 김정도) 판결문 중

근로관계는 아니지만, 회사는 플래너를 관리 감독할 수 있고, 플래너는 회사가 지시하는 웨딩컨설팅 관련 모든 업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일방적으로 회사에 유리한 계약서인 걸 알았지만 소정 씨는 거부할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을 거쳐 플래너 테스트까지 통과했는데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웨딩플래너로 일하기 위해서 대신 노동자로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소정 씨는 “플래너가 되려고 와서 2개월 동안 교육받고 테스트까지 통과했는데 그때 안 한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들 사인하게 된다”며 “마치 회사의 시스템이 당연히 그런 거처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웨딩업계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는 최유미(가명, 40대) 씨도 업계 전반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미 씨는 “사실 입사할 때 인센티브로 계약을 많이 하면 한 달에 몇백만 원 씩 벌 수 있다는 말로 현혹해서 입사하게 된다. 입사하고 나서 사정을 알게 된들 배우는 입장에서는 기대 심리 때문에 버틴다”며 “근무하고 있는 와중에 계약서를 쓰니까 그런 내용을 빼라고 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대구 한 결혼박람회 행사 유튜브 갈무리

퇴직금 받기 위한 3년의 소송
대법원, “웨딩플래너도 노동자”

웨딩플래너 7년 차가 되던 지난 2018년 소정 씨는 퇴사했다. 퇴직금을 청구하기 위해 고용노동청을 찾았다. 퇴사한 선배나 동료들은 모두 퇴직금을 받지 않았지만, 퇴직금 청구 진정만 넣으면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노동청에 가기 전 노무사 5명에게 자문했는데, 모두 긍정적인 답을 줬다. 퇴직금 청구 기한 3년이 남은 동료들 6명을 모아 함께 진정을 제기했다.

기대와 달리 노동청은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노동청은 웨딩플래너가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봤다. 소정 씨는 “이런 사례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노동청에서 결과 나왔을 때는 정말 암담했다”며 “정말 명백한 자료도 많았고 노무사님들도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땐 정말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검찰의 판단은 달랐다. 2019년 8월 대구지방검찰청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위반 혐의와 함께 근로기준법 위반(연차수당 미지급), 최저임금법 위반 등 모두 3개 혐의로 업체 대표를 기소했다. 2020년 2월 대구지방법원은 업체 대표에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 선고 후 항소한 업체 측은 소정 씨를 포함한 웨딩플래너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근로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플래너 계약서를 근거로 들었다. 정부의 코로나19 특수고용노동자 지원 대상에 웨딩플래너가 포함된다는 것도 덧붙였다.

“법정에서 검사님이 업체 대표한테 정말 한 번도 직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답하더라고요. 20대에 남는 거라고는 일한 경력,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 모든 게 부정당하는 느낌인 거에요. 진짜 너무한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 소정 씨

2020년 11월 항소심 재판부는 소정 씨와 같은 웨딩플래너는 근로자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업체 측의 형이 무겁다는 주장만 일부 인정해 벌금 1천만 원을 선고하고, 모두 13가지 이유를 들어 웨딩플래너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근로자성을 의심할 수 있는 사정이긴 하다. 그러나 업무수행 방식을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이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만으로는 개인사업자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 플래너 계약서에 서명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오히려 근로자임을 전제로 하는 듯한 내용도 존재하는 점, 업체 측이 사후 분쟁 발생 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으로 볼 여지가 상당한 점 등을 고려할 때 피해근로자들이 자신을 근로자가 아니라고 인식한 거라고 볼 수 없다···” – 대구지방법원 제2-2형사부(재판장 김정도) 판결문 중

소정 씨는 “2심 판결문에 정말 자세하게 왜 우리가 노동자인지 적혀 있었다. 그 판결문을 보는데 정말 눈물이 났다”며 “판결문이 너무 자세했기 때문에 또 상고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소송이 길어질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항소에 멈추지 않고 대법원까지 갔다. 지난 2월 25일 대법원 제3부(재판장 노태악)은 “피해근로자들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이후 1심 소송과 함께 제기했던 민사 소송을 통해 퇴직금 등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017년 웨딩플래너 근로자성을 인정한 판결이 한 차례 있었지만, 체불임금 지급이 인정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정 씨의 소송 과정과 결과는 업계에서도 이슈였다. 유미 씨는 “막연하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너무 시간을 오래 끄니까 저희 쪽에서는 엄청 이슈가 됐었다”며 “대법원 판결 보도가 딱 한 건 나왔는데,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사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놀랐었다”고 말했다.

검찰 단계에서 고소 대리와 민사 소송을 대리한 구인호 변호사(법무법인 참길)는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직종도 엄밀히 따지면 근로자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게 많다. 검찰과 법원이 그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전국적으로 이런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웨딩플래너가 많을텐데 이번 판결로 근로자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소정 씨와 유미 씨는 이번 판결로 웨딩 업계가 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업체에 소속된 웨딩플래너에게는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

“이건 회사가 잘못한 거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 거든요. 웨딩플래너를 하고 싶은데 이렇게밖에 못하는 거잖아요. 20대 사회초년생 청춘의 값을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이번 판결로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플래너들이 되게 많았어요. 진짜 내가 일한 거에 대한 보상을 받는 거 같다고 기분이 좋다고 해요. 이제야 위로받는 거 같아요. 그동안 웨딩 업계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왔어요. 앞으로는 무조건 (퇴직금을 받는 게) 관행이 돼야죠” – 소정 씨

“저희는 평생 한 번 하는 결혼을 내가 도와드린다는 자부심이 정말 커요. 그런데 10년을 일해도 퇴직금이 없었으니, 사실 일은 하고 있지만 나한테 남는 게 뭔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일하다 다쳐도 산재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에요. 보통의 직장이었다면 안 그랬겠죠. 기본적인 4대 보험, 퇴직금은 개선돼야 해요. 저희가 바라는 건 너무 당연한 건데 웨딩은 다 그렇다는 이유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유미 씨

김규현 기자
gyuhyun@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