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전부터 서울 한남동의 테이크아웃 드로잉에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시작했다. 노동당 서울시당과 땡땡책협동조합, 테이크아웃드로잉이 함께 연 이 독서회는 지금 우리 시대를 통찰하는데 도움을 줄 인물로 아렌트를 택했다. 매일매일 상식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이 사건들을 꿰어서 해석할 관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누가 나쁘고 사건이 심각하다는 생각만으로는 여기저기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사건들에 대처하기 어렵다. 그리고 대안을 생각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독서회의 장소인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상황도 그러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싸이는 왜 예술가들의 공간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을까?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선한 미소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온 YG엔터테인먼트가 왜 예술가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부유한 사람들이니 갑자가 돈이 필요한 건 아닐 테고 싸이나 YG가 조폭도 아니고 상식이 통할만한 사람들이라 믿었는데, 순간순간 갑작스런 폭력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야 할 경찰은 팔짱만 끼고 있고, 법원이 내린 판결은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반복되어온 식상한 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정말 예전과 똑같은 사건일까?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서구 역사의 일탈이 아니라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본다. 전체주의는 지배욕에 불타는 지도자나 열광하는 군중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누적되어온 사회의 모순이 지배계급의 정치적인 동기와 맞아떨어지면서 발생한 운동이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먼 옛날의 사건이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와 사회적인 조건이 혼합되면 지금 이곳에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다.
지배계급은 무한경쟁과 각자 알아서 살아남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하긴 오디션 프로그램과 한국 연예계야말로 이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첨병이다)를 유지하고 싶다. 그래야 지배계급이 만든, 부동산으로 한정되지 않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매트릭스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 당연히 헬조선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기지만, 지배계급은 이들에게서 에너지를 뽑아내야 하기에 탈출을 방치할 수 없다. 그러니 경쟁에 지치고 낙오되어 냉소하는 사람들이 분을 풀 대상을 찾아야 하고, 이 대상은 주로 사회의 약자들이다. 정치적인 시민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 재산이 없어 자기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된 공격의 대상이다.
그런데 사실 공격하는 사람도 공격을 당하는 사람도 모두 약자일 뿐이다. 지배자는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를 인간으로 만난다면, 공격의 방향이 바뀔 수 있겠으나 내 얼굴을 비춰볼 타자는 사라지고 있다.
우리에게 타자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만남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타자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약속조차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제도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렌트를 다시 읽고 읽다. 아렌트가 답을 줄 거라는 생각보다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두꺼운 책을 든 사람들을 모았다.
“무모한 낙관주의에도 또 분별없는 절망에도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전체주의의 기원>은 비판이나 대안보다 먼저 ‘이해’를 제안한다. 아렌트는 이해란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지운 짐을 검토하고 그 짐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의식적으로 그걸 떠안는 것이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며 현실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우리에게 이런 절망이 내렸나요, 이건 일시적인 상황일 뿐이야, 라며 현실을 비관하거나 현실을 낙관하지 말고 그 원인을 파악하고 때론 그 결과를 떠안으며 현실을 견디는 것이 아렌트는 중요하다고 봤다.
나치즘을 피해 유럽을 떠나야 했고 한때 수용소에 갇히는 끔찍한 경험을 했던 아렌트는 왜 비판이나 대안이 아니라 이해란 말을 먼저 꺼냈을까? 나치에 대한 증오보다 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일방적인 희생양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왜 서로가 인간으로, 시민으로 만나지 못했던가 그 역사를 먼저 살피자고 제안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법이 아니라 정치공동체가 서로를 평등하게 만든다. 타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할 때, 동료시민으로 만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바꿔 말하면 타자의 자유롭지 못함을 묵인하는 것은 나의 자유 상실로 이어지고, 타자의 상실은 만남의 부재로, 공동체의 상실로 이어진다. 타자가 없는 곳에서는 평등도 불가능하고, 불평등한 사회는 혐오와 증오를 조장한다.
약자에 대한 혐오나 증오는 약자가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그들이 시민권을 잃고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을 지키려고 할 때 발생한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그래서 강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약자에게 돌아오는 말은 보상금을 노린다, 언론플레이를 한다, 떼를 쓴다, 등이다. 만약 한국의 철거민, 장애인, 알바, 세입자 등이 시민권을 누리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쉽게 뱉을 수 없는 말이다.
평등이 사라진 한국사회에서 타자는 이미 지워졌고 위계질서와 재산이 인간의 서열을 정하는 이곳에는 이미 정치공동체가 없다. 뿔뿔이 흩어져 국적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만나고 어떤 사람과 헤어질 것인가.
거처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람의 헤어짐이 언제부터 이렇게 품위가 없어졌나? 주인은 코빼기도 비치지도 않고, 대리인들과 서류가 사람을 대신한다. 아무런 관계도 없고 돈만 받아든 용역들이, 정확히 말하면 돈만 챙기는 용역업체에 고용된 사람들(언젠가는 같은 처지가 될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한다. 서로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이해관계가 모든 것을 대신하는 사회는 이미 품위가 사라진 사회이다. 이제는 이런 사회와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새로운 만남을 가지려면 우리는 거처(居處)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생각을 의미 있는 의견으로 만드는 장소, 행위를 효과적인 행동으로 만드는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자유와 정의를 지켜줄 ‘권리를 가질 권리’는 다양한 만남들이 하나씩 뿌리를 내리면서 실현될 수 있다. 각자일 것 같지만 서로 이어져 있는 뿌리들이 만들어내는 공통의 세계, 하지만 이미 많이 사라진 세계, 그런 세계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
그런 점에서 가진 자들의 사유화(私有化)에 맞설 수 있는 건 우리들의 사유(思惟)와 점거이다. 이대로 순순히 사라지지 않겠다는 의지, 무엇이 이런 사태를 불러왔는지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이해와 판단, 이런 의견을 끊임없이 나누는 목소리들이 타자에게 가냘프게나마 들릴 수 있다면 아렌트가 말한 말과 행위의 정치는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이 사회는 숨통을 막으며 계속 압박하겠지만 나와 너, 우리의 공통세계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한 명의 심장이 멈출 때, 이곳 한 곳의 거처가 사라질 때, 남은 우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테이크아웃 드로잉의 망명객과 망명지는 우리의 심장, 우리의 거처이다. 이 망명지는 사나운 국가 안에 뿌리내리려는 힘겨운 정부이다. 우리 더 이상 그냥 사라지지 말자.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가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필자 동의를 얻어 <뉴스민>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