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구룡포에 사는 권선희 시인이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걷는사람)를 출간했다. 동해 해녀들이 철따라 물질로 길어 올린 돌미역, 전복, 성게 같은 동해의 맛과 바다가 허락한 그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한데 엮었다.
권선희 시인은 “해녀는 곤궁한 삶이 밀어낸 막바지가 아니라 어쩌면 운명처럼 바다를 선택한, 바다가 받아 준 유일한 여인들인지도 모른다”며 “기구한 팔자보다는 그들이 지닌 일에 대한 자부심과 현장을 담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해녀들의 한 해 물질은 봄에 채취하는 돌미역에서 시작해 겨울의 말똥성게에서 끝난다. 그사이에 전복, 문어, 해삼, 멍게, 소라, 보라성게, 군소, 굴 등을 비롯해 여러 바다풀이 있다. 작가는 동해 바다 속 생명체들이 사는 모습과 이들을 채취하는 방법, 특별한 요리법 등에 대해 해녀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동해 해녀들의 새봄은 봄꽃보다 ‘돌미역 마르는 냄새’에서 피어난다. 해녀가 회상한 봄이다.
“육지에는 풀이 팔팔 나고 꽃도 오만 데서 피지만, 우리 해녀들은 그거 쳐다볼 여가가 어데 있겠나. 울 집 앞에 벚꽃나무 한 그루 있잖아. 거기 꽃이 화들짝 필 때 바다엔 미역이 너불너불해. 물질하러 오메 가메 보는 게 다지. 내 평생 벚꽃놀이는 집 앞에서 다했다.” _ ‘돌미역’ 가운데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본 문어는 특별한 모성을 지녔다. ‘문어’를 보면 “문어는 알 지키는 동안은 절대 안 나와. 먹지도 못하니까 알이 부화할 무렵엔 굶어서 죽어. 그것도 엄마들이라고 애를 쓰는 거지. 불쌍치만 그런 거 다 어찌 간섭하나”라며 “알 가진 문어가 불쌍하다고? 그런 거 생각하면 뭔들 잡을 수 있겠나. 우리도 뭘 벌어먹어야 사니까 잡는 거지 문어가 미워 잡나”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녀가 되었을까. 작가는 이웃 해녀의 삶을 이렇게 적었다.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나이 든 부모와 어린 동생들을 둔 머리 큰 딸이 할 일이라고는 앞바다에 드는 것뿐이었다. 짧은 물옷을 입고 물질을 하다 보니 다리가 까맣게 그을려 암만 꽃 같은 처자도 맨다리로는 치마를 입을 수가 없었다. 숨 참으며 따 오는 것들 팔아 보리쌀도 바꿔 먹고 국수도 바꿔 먹었다. 옆 동네 총각과 중매로 결혼을 하고 와 보니 시집 살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물속에서 보낸 세월이 사십 년을 넘고 오십 년을 넘었다. 해녀들끼리는 떨어져 사는 친자매들보다 더 사이가 좋다. 네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어울려 기르고, 경조사 함께 치르며 늙었다. 비린 바람 맞으며 추우나 더우나 당하게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해녀라는 바다 인연들 덕분이다. 숨을 붙들고 사는 인간이 숨을 참고 하는 일, 대단히 경건한 일이다.” _ ‘소라’ 가운데
해녀들의 삶의 터전인 동해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나이 든 해녀가 말했다.
“바다풀도 사람처럼 젊었다가 시들어지면 다 물 밑에 앉거든. 물 밑에 자리가 있어. 그거 다 들어내고 나면 전복, 해삼 막 있었지. 이제는 바다가 백화현상인가 뭔가 아무것도 없어. 풀이 없으니 전복도 없지.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곳에 살겠나.” _ ‘바다풀’ 가운데
바다도 변했다.
작가는 ‘바다풀’에서 “해녀가 웃는다. 웃는 모습에서도 바다 향기가 온다. 나이가 들고, 바위에 무수히 찍혀 둥글어진 무릎은 서서히 탈이 난다. 수술하고 아물면 또 바다로 들어간다. 젖고 마르며 사는 세월이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른다. 그저 참을 숨과 놓을 숨 사이에 바다처럼 해녀로 있는 것이다”고 이야기를 마쳤다.
권선희는 춘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고, 대구경북작가회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 봄 구룡포로 이주해 바다와 어울려 살며 글을 쓴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 <꽃마차는 울며 간다>와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를 거점으로 포구의 역사를 다룬 르포집 <구룡포에 살았다>(2인 공저)를 냈다.
사진을 맡은 김수정 작가는 대구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영상학을 전공했다. 빛과 그림자, 바다 관련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