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발목에 총을 맞아 피가 흐르는 정애와 운산이 남매의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고 내동에 남았는데
학살 소식을 듣고 손자와 손녀를 찾아 청연마을로 혈혈단신 오셨다
할아버지의 큰며느리와 아들 하나 딸 둘은 청연골에서 이미 죽었다
군인들 눈에 띄면 죽을 수도 있는데 참으로 간 큰 노인이다
할아버지는 미친 듯이 시체들을 헤집고 다녔다
마침내 정애와 운산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품에 안고
정신없이 달아나셨다
나도 집안의 손자뻘이 되는데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았다
살겠다고 나도 할아버지의 뒤를 무조건 따라갔다
양말만 신고 가시밭을 지날 때는 발바닥이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채여서 그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아팠다
청연에서 내동까지 십리길 굽이굽이 모롱이를 돌고 돌아 집에는 왔는데
아버지도 큰형도 보이지 않고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피에 젖은 양말을 벗어던지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한없이 슬퍼졌다
마을 사람들이 담 너머로 나를 보더니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엄마와 세 자매가 외가로 피난을 간 줄 알고 있었는데
어린 것이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측간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돌아와
울기만 하는 사연을 궁금해하였다
“야야, 와 그리 우노. 니 꼴이 와 그러노.”
“국군들이 청수테(청연) 사람, 내동 사람 다 죽였어요.”
“그놈들이 그믐날 그 독장을 지기더니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았구만.”
“너거 오매랑, 너거 형이랑, 여식아까지 다 죽었단 말이가?”
“너희 아버지는 아침에 군인들 짐 지고 갔는데 못 만났나?”
동네 사람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니는 우찌 살아왔노?”
사람들 속에 끼여 잘 모른다고 했는데,
훗날 오매 치마 속에 휩싸여 살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머니의 지극한 영혼이
어린 나를 살렸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니 사람들 속에
운출이 아버지와 미순이 오빠가 보였다
애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 빨리 가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정신을 놓지 않고 말을 해주어서
운출이는 이틀 만에 데리고 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기적이었다
미순이도 살았다
내동 애들은 나까지 다섯(나, 정애, 운산이, 운출이, 미순이)이 살아남았다
어린 운산이는 그 후에 일찍 죽었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워낙 추우니 피에 젖은 옷이 빳빳하게 얼었다
얼은 옷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앞집 할머니가 미지근한 숭늉을 한 사발 주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가난한 할머니집인데
물에서 소고기 냄새가 나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고기 냄새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했다
몸을 녹일 만한 곳이 없었다
방도 불을 땐지 오래되어 냉골이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방구석에 앉아 있으니
춥고 배가 고프다
조산말(오례)에 밥 얻으러 다니는 아이가 생각났다
바가지를 들고 다니며 부엌 문전에서
“밥 좀 줘요. 밥 좀 줘요.”
바가지 가득 밥을 얻어
담벼락 밑에 앉아 맛있게 먹곤 했다
나도 부엌에 있는 바가지를 들고 밥 동냥을 나가볼까, 생각했다
마을 곳곳엔 빈집인데 이 난리통에 누가 밥을 줄까,
막막했다
아, 모지랑 할매가 있었지
우리 집에서 세 번째 집에 있었다
두 발목이 없어 무릎으로 다니기 때문에
‘모지랑 할매’라고 불렀다
할매는 점을 치기도 하고
푸닥거리도 하며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
아버지와는 친하게 지냈다
할매 집에 가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맨발로 눈을 밟았다
얼어붙은 눈은 칼날이었다
발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팔딱 팔딱 뛰면서 대문을 나서는데
저 멀리 청수골 쪽에서 군인들이 또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군인들한테 걸리면 죽는다,
죽음 앞에서 발이 시린 것은 온데간데없고
화살처럼 몸을 튕겨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루 밑에 숨을까, 집 뒤란 땅굴 속에 숨을까, 궁리를 했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어째야 할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감악산 당산나무 쪽으로
사람들이 희끗 희끗 눈발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으로 무조건 달렸다
다리는 가시에 찔리고 발은 돌부리에 채여서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마을 사람들을 따라잡았다
당산 옆 후미진 골짜기로 가는 대열에 합류했다
사람들은 피에 얼룩진 나를 가까이 하지 않고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는 청연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산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쳐
너무나 춥고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력 정월 초나흘의 해는 짧기도 하여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끼리 모여앉아 이불을 두르고도 춥다고 하였다
나는 외따로 홀로 앉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서럽고 외로웠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정신은 희미해져오는데
사람들은 여기 있다가는 얼어 죽겠다면서
나 혼자 남겨놓고 모두 어디론지 가버렸다
어둡고 무서운 감악산 깊은 산속에 나는 버려졌다
당산에는 귀신도 호랑이도 있어
한낮에도 담력이 약한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캄캄한 당산 옆 산속에서 혹독한 추위에 나 혼자 남았다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저승의 문턱에서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올라온 길을 더듬었다
조심조심 기어본다
바스락 소리에 산짐승인가 놀라기도 하고
가다가 무릎이 아프면 걷고
발바닥이 쓰라리면 주저앉고
피눈물을 흘리며 산을 내려왔다
마을 뒤 바위에 걸터앉아 갈 곳을 생각해 본다
‘너무 추워서 산에서 밤을 보낼 수 없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마을에는 군인들이 득실대고 잡히면 죽일 것 같은데
그때 검은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갔다
호랑이나 늑대인 줄 알고 기겁을 했는데
마을의 작은형의 친구, 김점외의 아버지였다
그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바위틈에 숨었다
무서운 곳에서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웠는데
아저씨는 바보스러운 분이다
여기 있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니
아저씨 보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졸랐다
그때였다
“손들엇!”
싸늘한 쇠붙이가 가슴을 찔렀다
아저씨는 바위틈으로 숨었으나
두 명의 군인은 아저씨를 끌어냈다
군홧발로 개머리판으로 아저씨를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아저씨는 실신했다
군인들이 물었다
“이 새끼, 니 아버지냐?”
“아니요. 이 동네 사는 아저씨라요.”
“넌 왜 여기에 있냐.”
“사람들 따라서 피난을 가다가 갈 곳이 없어서요.”
“이것들 빨갱이 첩자 아냐?”
나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처치하고 가자.”
이젠 죽었구나,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군홧발이 사정없이 배를 찼다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배가 아파 쩔쩔 매는데
“이 새끼야, 일어나!”
다시 군홧발이 들어오더니 나는 정신을 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