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 피난(2월 8일)
큰집에서 정월 초사흘까지 보내고
어머니와 작은형 나와 여동생은
눈길을 헤치고 서둘러 내동 집으로 돌아왔다
2월 5일 섣달그믐날 가마니로 덮어놓았던
시체는 치워졌는데 그 옆을 지나가려니
귀신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사흘 동안 비워놓았던 방은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총알이 지나가서 뚫린 방의 벽은
걸레로 막아놓았지만 을씨년스러웠다
어머니는 방안 정리를 한 후에
옷이 얇은 작은형에게
아버지 저고리를 껴입히고 피난을 나섰다
작은형과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의 뒤만 졸졸 따랐다
길에는 눈이 소복했다
사람들은 짐 보따리를 이고지고
청연마을을 향해 흐르는 사천천을 건너고 있었다
오례마을 쪽에서 장총소리가 산천을 흔들었다
‘딱콩’이라는 총이었다
괴한이 장총을 쏘며
당장 그 자리에 서라고 손짓을 하며 달려왔다
피난민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다
괴한은 번개처럼 달려와서는
곧 해방이 되는데 어딜 가느냐며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소리쳤다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못하고 되돌아갔다
돌아온 안방은 추워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불 피울 준비는 안 하시고
동생을 업고 안절부절 하셨다
총을 들고 다니는 괴한은 빨갱이라는데
빨갛게 생기지는 않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갱이들은 들판을 날아다니는 듯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번개같이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는 대문간 옆에서
빨갱이가 멀리 사라졌는지
숨어서 확인을 한 뒤에
작은 형과 나를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살금살금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갔다
큰길이 아닌 마을 뒤 야산으로 올라가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따라
다시 피난을 떠났다
꽁꽁 얼어있는 개울에 눈이 내리니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나는 연신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아파도 속으로 삼키고
어머니 뒤만 따라갔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개울이 합쳐지는 냇물을 건너
논두렁을 기어올라
마을에서 한참 멀어진 대바위골 오솔길에 도달했다
‘대밭기’라고도 하는 곳인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여
호랑이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음침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산자락으로 나있는 오솔길에는 눈이 그대로 있어
짚신을 신은 양말은 눈에 금방 젖어들었다
발도 시리고 추워서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는 작은형이 입은 아버지의 저고리를 벗겨서
나에게 입혀주었는데 따스했다
작은형은 말없이 벗어주었다
내동에서 청연마을까지는 십 리 길인데
빨갱이를 피해서 산으로 둘러오느라
어느새 점심때를 넘겼다
길가에는 주막이 있었다
거창 읍내를 드나드는 길손들의 쉼터이기도 하고
목마른 길손들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곳이었다
난리통에 문짝이 바람에 나가떨어지고
안에는 피난을 가다가 죽은 시체가 방치되어 있어
흉가가 되어버렸다
청연마을을 지나서 무촌 외가로 가야하는데
춥고 배가 고파서
청연마을에 있는 어머니 친구 집을 찾아갔다
(아,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 큰 불행으로 닥쳐올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춥고 배가 고파도 남상면 경계를 넘어
무촌 외가로 갔어야 했다
어머니 친구 내외분은 박순근(당시 16세)이라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아들과 살고 있었다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하니 명절 떡국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풍년이 들어
이번 설에는 떡국에 소고기가 들어갔다며 자랑을 했다
육식을 먹는 사람들은 별미였겠지만
작은형과 나는 고기를 못 먹으니 그림의 떡이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두드러기가 돋아서
배는 고픈데 먹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유과 부스러기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몸도 녹였고 쉴 만큼 쉬었다
외가로 가야하는데 눈보라가 날리더니 날씨가 사나워졌다
어머니 친구 분은 자고 날이 개면 가라고 붙들었다
정초의 해는 짧기만 하여서 금세 저녁때가 되었다
저녁에도 낮에 먹다 남은 떡국으로 허기를 때웠는데
작은형과 나에게는 식은밥이 나왔다
소고기 냄새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또 한 끼는 넘어갔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옹달샘에서 길러온 물로 설거지를 하고
세상 이야기를 도란도란하셨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문풍지도 추운지 파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