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젠킨스 감독은 <원더우먼 1984>의 특징에 대해 “선과 악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원더우먼은 여러분들 안에 있는 영웅을 끄집어내 세상을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라고 설명했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재앙에서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위기를 맞은 현 시대와 맞물린다.
“인생은 아름다워요. 하지만 더 좋아질 수 있어요. 무엇을 원하고 꿈꾸든 가질 수 있어요.” 악당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는 끝을 모르는 욕망으로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TV에 나와 대중의 욕망을 악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던 그는 큰 힘을 얻게 되면서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의 탐욕은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와 다이애나 프린스(갤 가돗)의 욕망과 이어진다.
다이애나는 전작에서 연인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를 잃은 뒤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무려 70년이나 지났지만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그는 정체를 숨긴 채 인류학자이자 고고학자로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일한다. 종종 원더우먼으로 변신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다. 하지만 삶에 열정을 잃었다. 보석학자 바바라는 외톨이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탓에 주목받는 삶을 갈망한다. 그는 아름답고 강한 다이애나를 동경한다.
다이애나와 바바라, 맥스 로드의 욕망은 소원을 들어주는 황수정을 통해 현실이 된다. 죽은 연인이 되살아나고, 섹시한 커리어 우먼이 되고, 석유 재벌이 된다. 하지만 소원에는 대가가 따른다. 다이애나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바바라는 인간성을 상실한다. 맥스 로드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자신의 힘을 키운다.
영화의 배경은 1984년이다. 70년 전 인류를 위협한 건 전쟁이었는데, 이제는 욕망이 인류를 멸망시킬 위협 요소가 됐다. 다이애나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전쟁을 선동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물리쳐 인류를 구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풍요로워진 세상에서 인간의 본성과 맞서 싸운다. 원더우먼은 전작에 비해 성숙해졌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원더우먼은 세상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인간처럼 욕망을 품고, 감정적으로 아파한다. 다이애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 싫다는 욕망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내면이 강해진다.
<원더우먼 1984>는 히어로물의 쾌감보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원더우먼은 사람들의 욕망이 불러온 재앙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타적인 인류애는 그가 왜 인간을 사랑하고 수호하는 영웅이 됐는지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는 코로나19에 잠식당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욕심과 욕망이 치솟을수록 지구는 생지옥으로 변한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렀고, 코로나19의 재앙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됐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악인을 처단하면 선이 이긴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구조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더우먼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영웅을 끄집어내 주는 인물이다. 공감 능력과 관대한 마음, 친절한 마음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더우먼 1984>는 아쉬운 점이 많다. 먼저 구성 자체가 어수선하다. 영화 한 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 한 탓이다. 151분 동안 원더우먼의 고향 데미스키라섬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광과 박진감 넘치는 아마조네스 전사들의 경기, 풍족한 1980년대 미국의 모습, 각 캐릭터의 사연, 원더우먼의 액션, 인간 욕망에 대한 메시지 등을 전부 설명하게 되니, 난잡할 수밖에 없다.
영화 시작 10분가량 차지하는 아마조네스 경기는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사족에 불과하다. <원더우먼 1984>만의 독창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곳곳에 익숙한 설정이 관행처럼 끊이지 않는다. 액션도 전작에 비해 아쉽고 원더우먼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CG는 과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