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테넷’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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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어렵고 복잡하다. ‘10분짜리 기억력’을 가진 남자의 범인 추적기를 다룬 <메멘토(2001년)>는 ‘다회차 관람’이 필수인 영화였다. 이야기가 결말에 도달한 뒤 전개를 거꾸로 돌려보면 영화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서다. 결말을 알고 난 뒤 다시 영화를 보면 색다른 감흥을 얻게 된다.

<인셉션(2010년)>은 ‘꿈속의 꿈을 꾸게 해 사람의 생각을 훔친다’는 혁신적 발상을 복잡한 인과에 담아냈다. 관객 입장에선 영화 관람이 거대한 미로를 풀어가는 일과 다름없다. 영화의 전개를 선형적으로 재배치한 뒤 조망하면 결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1회차 관람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인터스텔라(2014년)>는 상대성 이론·웜홀 등 과학이론을 영화에 풀어냈다.

놀란 감독의 상상력은 영화 속에서 관객의 구태의연한 생각의 틀을 산산이 부숴버린다. 1회차 관람으로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영화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보게 되면 더욱 재미있어진다. 지난 8월 개봉한 <테넷>은 놀란 감독의 영화 중 감상 난이도가 극악 수준에 이른다. 한 번 보고서는 남들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고뇌하게 된다. ‘복잡하고 어렵다’는 말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뭔가 대단한 걸 본 것 같긴 한데 이를 설명하기는 난감하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영화는 서사가 단선적이다. 그래서 <테넷>을 보기에 앞서 알고 가면 좋은 팁을 몇 가지 소개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는 게 항상 가장 좋은 관람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는 앞뒤로 읽어도 똑같은 회문(回文) 구조와 관련이 깊다. 영화의 제목인 <테넷(TENET)>부터 설명하자면, 단어의 뜻은 주의, 교리, 견해, 신념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TENET은 폼페이 유적지에서 처음 발견된 2차원 회문 ‘사토르 마방진(Sator Square)’에서 따왔다. ‘SATOR(사토르)’ ‘AREPO(아레포)’ ‘TENET(테넷)’ ‘OPERA(오페라)’ ‘ROTAS(로타스)’로 다섯 글자 라틴어 다섯 개 단어로 구성된다. 앞뒤 대칭이 뚜렷한 TENET은 영화의 시간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다섯 개 단어 모두 미래 세력을 등에 업은 악당(사토르), 오페라 하우스 테러(오페라), 인버전을 하는 회전문 기기 이름(로타스) 등으로 영화 곳곳에 출몰한다.

영화에서 시간은 순방향과 역방향 두 가지 방식으로 흐른다. 이 중 역방향은 시간을 한순간 이동시키는 시간여행과 개념이 다르다. 영화는 사물의 엔트로피(Entropy,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원래로 돌아갈 수 없는 현상)을 반전시켜 시간을 되감는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시간을 2시간 되돌릴 경우 2시간 전으로 ‘뿅’하고 이동하는 게 아니라 2시간 동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2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2시간만큼 머무르며 역행해야 원하는 시간대에 다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미래에서 거슬러온 내가, 내가 머물고 있는 과거에 공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 역행을 해제하면 다시 시간은 순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때 역시 원래 살던 미래로 순식간에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흐름만을 순방향으로 바꾸고 다시 미래를 향해 살아나가는 것이다.

영화는 이를 ‘인버전(Inversion)’이라는 시간 역행 기술로 시각화한다. 시간을 되감는 인버전이 앞서 앞뒤가 대칭인 회문 구조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영화에서는 시간 역행 장치 ‘회전문’을 통해 인버전 한다. 회전문을 통과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시간을 역행하게 되면 거꾸로 되감기되는 과거의 산소를 자연스레 흡입할 수 없어 공기 제공 기기를 활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인버전 된 사람은 산소 공급 기기를 착용한다. 회전문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통과하면 모든 게 다시 순방향으로 지나간다.

사람과 사물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테넷의 중심 인버전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과 존 휠러의 이론에 근거한다. 파인먼과 휠러는 시간의 화살을 강제로 역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면 전자가 반(反)입자인 양전자로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전자는 물질에 대칭되는 반물질을 뜻한다. 영화는 이 이론을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닐(로버트 패틴슨)이 같은 장소에서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주인공(전자)의 시선과,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 된 주인공(양전자)이 마주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주인공은 그 과거를 실시간으로 살고 있는 주인공과 정반대로 움직인다. 거꾸로 걷고 말도 되감기하는 듯 들린다.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 점점 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는 주인공은 오히려 온 세상이 되감기 하듯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새가 뒤로 날고, 배가 뒤로 가고, 화상 당한 손이 동상을 입고, 흙먼지가 흙으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버전 된 주인공이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는 게 아니라 이미 발사돼 있던 총알이 총구로 빨려들며 대상을 관통한다. <테넷>은 이러한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섞은 설정을 영화 곳곳에 선보인다. 다회차 관람에서 이런 요소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시간의 특이점을 관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건 놀란 감독의 장기인데, <테넷>에서는 카 체이싱 액션을 통해 인상적으로 선보인다. 영화에서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의 차가 주인공과 닐이 탄 자동차를 추격한다. 인버전 상태이기에 후진 주행 중인데, 갑자기 주인공 앞에 전복된 차 한 대가 등장한다. 이 차량은 순식간에 사고 전 상태로 되돌아가 도로를 주행한다. 그 차 역시 인버전 상태이며,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 온 주인공 자신이 탔다. 시간의 순행과 역행이 결합한 기묘한 이 장면은 ‘만약 시간이 뒤로 흐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간의 순행과 역행은 복잡하고 알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는 시간의 순행을 빨간색, 역행을 파란색으로 구분한다. 이는 빛의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도플러 효과란 물체나 관측자의 이동에 따라 파동이나 진동이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멀어져갈 때는 진동 또는 파동의 주파수가 길고 낮게 관측되며, 다가올 때는 짧고 높게 관측된다. 소리의 진동수 변화는 음높이의 변화로 나타나는 반면, 사람이 볼 수 있는 빛, 다시 말해 가시광선의 진동수 변화는 색깔의 변화로 나타난다.

가시광선에서 푸른색 빛은 상대적으로 큰 진동수와 짧은 파장의 빛이고, 붉은색 빛은 작은 진동수와 긴 파장의 빛이다. 예를 들어 빛을 내는 물체가 다가오면 빛의 진동수가 커져 좀 더 푸른색으로 변하고, 빛을 내는 물체가 멀어지면 빛의 진동수가 작아져 좀 더 붉은색으로 변한다. 푸른색을 의미하는 ‘청색’과 붉은색을 의미하는 ‘적색’에서 한쪽으로 옮겨간다는 의미의 ‘편이’라는 단어를 써서, 도플러 효과로 빛의 진동수가 커지는 현상을 진동수가 큰 푸른색 쪽으로 옮겨간다고 해서 ‘청색편이(blue shift)’, 빛의 진동수가 작아지는 현상을 진동수가 작은 붉은색 쪽으로 옮겨간다고 해서 ‘적색편이(red shift)’라고 부른다.

영화에서는 회전문 통로의 불빛, 영화 후반부 전투신에서 군인들의 팔에 두른 띠의 색깔로 나타난다. 주인공과 닐이 과거로 거슬러 가기 전 문 앞의 색상은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 회전문의 빨간 불빛 입구로 들어가면 현재로부터 멀어져 과거로 도착, 바로 옆 파란 불빛 출입구로 나오게 된다. 마지막 전투에서 빨간색 띠를 팔에 두른 군인은 시간을 순행하고, 파란색 띠를 두른 이들은 시간을 역행하면서 작전을 수행한다.

이러한 요인을 알고 본다면 <테넷>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영화는 시간 역행 전후의 물리적 법칙을 포함해 설정과 전개가 퍽 복잡하다. 그런데 따져보면 놀랍게도 대부분 앞뒤가 들어맞는 묘미가 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 전체가 일종의 회문 구조이고, 영화 전체에서 시간 역행하는 이들이 있다. 조금 허무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일어난 일은 일어났어야만 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시간 역행은 실현 불가능하지만 이를 영화로 구현해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제작진의 발상과 노력이 경이롭다. <테넷>은 지난 15일 VOD로 공개됐다. 75분 분량의 스페셜 영상도 포함됐다. 놀란 감독의 팬이라면 꼭 보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