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주] 이 글은 지난 11월 26일 백석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읽은 것이다.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린 것에다 약간의 가필을 한 것이며, 《창작과비평》 측의 양해를 얻어 싣는다. 자세한 심사평 등은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려 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혼자 괜스레 가늠해보다가 결국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생각임을 깨닫고는 합니다. 미래의 ‘현실’은 현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를 터인 데다가, 현재의 ‘현실’이 미래의 ‘현실’의 원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앞으로 현재가 어떻게 진행될지 감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이런 막막함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그동안 이 막막함을 인정하지 않고 미래의 ‘현실’을 섣불리 판단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없지 않습니다. 미래의 ‘현실’에 대한 오래된 이 오만이 오늘날의 난경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근대인의 관점이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당대의 관점으로 미래의 ‘현실’을 판단하려 했다면 그것은 분명 과거의 ‘현실’도 근대인의 눈으로 규정하고 편집해왔던 습관 때문일 겁니다. 인간에게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자기 보존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가 미래의 ‘현실’을 상상하려면 다른 눈이 필요할 것만 같았고, 그 다른 눈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먼 행성 같은 데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 과거의 ‘현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백석의 「목구(木具)」라는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지나간 시간을 현재의 ‘현실’로 불러들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정주 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가계를 말하고 있지만, 백석은 제상에 쓰이는 ‘목기’를 통해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 줌 흙과 한 점 살과 먼 옛 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고자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았던 백석과 함께 현재의 ‘현실’을 관통해 미래의 ‘현실’에 가닿을 수 있을까? 한때 저는 이 물음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단지 백석을 재현하려는 시단의 오래된 흐름에 편치 않은 심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백석을 읽을 때 부정적으로 개입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목구(木具)」를 비롯한 백석의 시를 다시 읽다가 백석의 비근대적 ‘현실’이 우리에게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시가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을,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을, 오랜 과거와 “피의 비”가 쏟아지는 현재를 담는 “목구”라면 미래의 ‘현실’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이는 단지 「목구(木具)」에게서만 느끼는 바가 아닙니다.
물론 백석의 시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다른 ‘현실’을 상상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백석의 인식과 정신과 정서가 그가 살았던 현실에서 만들어졌듯이, 지금 여기에서 쓰는 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복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지 리얼리즘적 양식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백석을 말하는 자리에서 김수영을 불러들이는 게 어색하기는 합니다만, 김수영이 말했듯이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진리를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숨 막히는 근대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백석의 시를 영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니까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시를 쓸 수 있다면 아직껏 서 보지 못한 지평에 다다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설령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생각과 꿈들은 그 자체로 존재를 설레게 합니다.
돌아보니 제게 이런 생각과 눈을 선물해주신 분은 지난여름에 우리를 두고 떠나신 김종철 선생님이었습니다. 김종철 선생님을 다시 기억하면서, 동시에 제 젊은 날의 야물지 못한 문학을 단단하게 다져주었던 창비에게 과분한 상을 받게 되었음을 뜻깊게 생각합니다. 제가 해야 하는 감사의 표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다는 아직 멀지만, 그러나 바다는 여름날의 태풍으로도 오고 한겨울에 함박눈으로도 온다는 진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웃음을 잃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