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내미는 손, ‘내가 죽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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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오빠가 저지른 범죄의 주요 증인으로 경찰에 의해 외딴 섬에 남겨진 18세 소녀 세진(노정의). 태풍이 몰아치던 날,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사라졌다. 흔적은 절벽 근처에 남은 신발 한 짝이 전부다. 증인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인 경찰은 세진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지으려고 한다.

복직을 앞둔 경위 현수(김혜수)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세진의 실종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는 남편(김태훈)의 외도로 인한 이혼소송으로 고통받고 있다. 외도를 전혀 몰랐던 현수는 갑작스런 이혼 조정 재판에 절망에 빠진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날 벌어진 교통사고로 신체 마비까지 왔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휴직했다. 이를 겨우 이겨내려는 찰나, 남편은 언론을 통한 여론몰이로 현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복직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현수는 세진이 지내던 섬을 찾는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세진이 머물던 집에서 그가 남긴 흔적을 조사한다. 그런데 CCTV를 보던 현수는 화면을 노려보는 세진에게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현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현수의 삶은 순탄치 않다. 임무를 맡긴 상사(김정영)는 적당히 마무리하라며 압박하고, 세진의 주변인들은 현수를 의뭉스럽게 대한다. 세진의 보호를 담당하다가 일을 그만둔 전직 형사 형준(이상엽), 연락이 두절된 가족 정미(문정희)는 현수를 피하기만 한다. 세진의 행적을 추적하는 현수는 믿었던 가족과 경찰에 배신당한 세진이 홀로 감당했을 고통에 동질감을 느낀다. 결국 세진의 사건에 점점 더 몰두하고 감춰진 진실에 조금씩 다가간다.

벼랑 끝에 선 세진과 현수에게 손을 건넨 유일한 이는 순천댁(이정은)이다. 그는 동생의 자살을 경험한 뒤 충격을 받아 농약을 마셨다. 목숨은 지켰지만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순천댁은 전신마비 장애를 지닌 조카를 양녀로 받아들여 그를 챙기며 고통을 감내한다. 순천댁이 세진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현수에게까지 닿아 위로한다. 영화는 순천댁 만이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 일말의 힌트를 꾸준히 제시하며 관객의 시선을 끈다.

<내가 죽던 날>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태를 띠지만, 각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서정 드라마로 그려진다. 현수의 독백과 주변 인물의 시선을 통해 인물의 심리 변화에 집중한다. 서사는 한순간 무너진 삶에 좌절한 이들이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한다. 여성을 범죄의 피해자 등 수동적 존재로 묘사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배우의 세밀한 감정 연기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한다.

<내가 죽던 날>의 강점은 상처받고 좌절해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대사다. 구원이나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나는 내 삶이 괜찮은 줄 알았다. 근데 나도 모르는 새 내 인생이 박살났다”, “아무도 ‘그럴 애가 아니야’라는 말을 해주지 않더라.”, “살려고 그랬어. 살려고 발악하는 얼굴이야.”, “아무도 없다고? 네가 있잖아. 아무도 너를 구해주지 않아. 네가 너를 구해야 해.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각종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흠결은 현수가 진실을 쫓는 과정이 늘어진다는 점이다. 감정선이 중심이 되어 짜임새가 탄탄하지 않은 탓이다. 사건의 실체는 분명하지만 세진의 새엄마나 보호관찰 담당 형사 형준 등 의심할 만한 정황을 잔뜩 던져놓고 매듭짓지 않는다. 관객은 이들이 처한 상황을 한두 마디 대사로 추정해야 한다. 중반 이후 군데군데 끊기는 오디오 문제도 집중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