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했던 시절’ 대구 고향집, ‘전태일 집’ 되다

시민 3,000여 명 모금해 살던 집 매입...'전태일기념관' 건립

18:49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던 대구에서 살던 집에 ‘전태일’ 문패가 달렸다. 사)전태일의친구들은 시민들의 모금으로 최근 집을 매입했고, 전태일기념관 건립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전태일’ 문패를 거는 전태삼 씨(오른쪽)와 이재동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왼쪽)

12일 오후 4시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에 ‘전태일’ 문패가 걸렸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이듬해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갔다. 이후 서울을 거쳐 15살이던 해에 다시 대구로 내려온다. 전태일과 여섯 가족은 이곳 주인집 한쪽 공터에 판잣집을 마련해 1년 6개월가량 살았다. 전태일은 대구에서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1964년 서울로 올라가 돈을 벌기 시작한 그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대구전태일기념관 건립을 위한 살던 집 매입 기념식 및 전태일 문패 달기’ 행사에 참석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 씨는 “70년 11월 10일에 형이 내려와서 청옥고등공민학교 여부반장을 만나 3일 후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학교에 갔다가 이 집에 한 번 들렀다 (서울로) 올라갔다”며 “이 자그만 집에서 여섯 식구의 운명이 결정됐다. 열다섯 살의 전태일의 운명이 결정되는 집이기에 꼭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태일의친구들은 지난해부터 이곳을 매입해 기념관으로 건립하기 위한 시민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날까지 시민 3,000여 명이 참여해 매입비 4억 3,000여만 원을 모금했다. (관련기사=‘허물지 말아 달라’···전태일 옛집, 8년 만에 빛 보는 약속(‘19.9.17))

▲모금이 참여한 3천여 명의 시민들

이재동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은 “열사께서는 50년 전 오늘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절망과 큰 고통에 빠졌을 것이다. 그 작은 목소리는 큰 메아리가 되어 많은 사람이 일어나게 했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다”며 “우리 지역에서 열사의 삶을 추적하면서 이 집을 찾아내고 지키기 위해 많은 분들이 나섰다. 오늘 그 노력이 모여 열사의 짧은 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낸 이 낡은 집에 전태일의 이름을 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도 “지금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는 이 집이 어떻게 보면 전태일 열사가 꿈을 키우고 마음을 다진 곳이다. 모금을 통해 이곳을 매입하고 문패를 다는 대구 전태일의친구들에게 너무 고맙다”며 “이제 전국의 노동자와 민중들과 그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곳에 전태일의 집을 마련하고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전태일의 마음과 정신을 펼쳐내고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은사인 이희규 씨, 서울 평화시장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친구 최종인 씨도 참석했고, 시민 50여 명이 모였다. 또,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인 황규관, 조기현 시인이 기념시를 낭독했다. 이들은 1시간가량 기념식 후, 옛 청옥고등공민학교까지 함께 걸으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전태일이 살던 집,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