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니다. 그저 책을 읽은 다음에 생산해야 할 것 같은 육체노동의 결과물과 비슷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전에는 취미라는 칸에 ‘독서’라는 단어를 쓴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어쩌면 가장 내밀한 부분일 수 있는 책 읽기가 의무처럼 혹은 강박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어떻게 읽는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
연재를 시작하지만, 글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의 윤리성이 일관되게 유지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그 두려움을 격려해주는 사람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발 내디뎌 보기로 한다. 익숙하지 않은 낱말과 해묵은 단어들이 교차하는 엉망진창의 향연이 될 것이다.
사람은 참 모순적이다. 노동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노동하기를 갈구한다. 살려고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라는 자조 섞인 질문들은 끈질기게 우리 주변을 맴돈다.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예전 집회에서는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이 말에 여러 뜻이 담겨있겠지만, 적어도 상당히 공격적인 구호였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사회적 요청이 많아졌다. 노동의 의미가 변했다는 것을 구호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고명하신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노동의 의미는 변한다. 플라톤 이래 천대받아온 노동의 의미를 되살린 것은 헤겔이고, 절정은 바로 맑스의 노동가치론이었다. 노동가치론이 정말 과학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노동의 의미를 긍정하고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이론적 개입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인가 하는 흐름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과도한 긍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과 노동을 국가와 자본에 부품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라는 비판 의견도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 좋고 싫은가를 판단할 만큼의 지적 능력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의미와 관련된 치열한 논전이 있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처참하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악을 지속해서?밀어붙이고, 이미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팔고 있다. 공식적인 노동시장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나 아직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안정적인 노동의 권리를 얻으려고 고시원에서, 해외연수 사이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노동시장에 지속해서?포함되어 있더라도 최저임금과 가혹한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살아간다는 것, 노동으로 제 한몸과 사람을 이 세상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화장실에서 변기를 청소하든 참으로 구질구질하고 핍진한 일상의 연속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일상을 재현하는 데 있어 주목하고 싶은 매체는 만화이다. 수많은 명대사를 남긴 ‘송곳’, 주인공 장그래가 정책적 입법안과 사회운동 캠페인으로 이용되는 ‘미생’의 대히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오늘은 출판만화계에 등장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마영신과 김성희를 주목한다. 사회적 이슈를 주로 다룬 단편모음집이나 삼성반도체 문제를 다룬 만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낯익은 이름인 김성희의 ‘오후 네시의 생활력’과 장편 ‘남동공단’, ‘길상’으로 유명한 마영신의 ‘엄마들’을 보며 나는 다시 유물론을 떠올렸다.
주인공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지식인/이론가들이 만든 노동에 대한 수많은 관념은 그들의 단단한 육체와 삶에 부딪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관념어와 개념어를 녹여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유물론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당신들의 유물론’이 아닌 ‘우리들의 유물론’의 발견이라고 해두고 싶다.
이 두 권의 책은 역사의 주인, 진리의 구현자로서 노동자의 노동을 그리지 않는다. 질척이고 지긋지긋한 땀으로 점철된 살아있는 생활인으로서의 노동을 보여준다.
이들 책은 서로 그림체, 구성이 전혀 다르다. 물론 이주노조, 청소용역노조가 나오고 여러 갈등상황이 나온다. 하지만 공통분모도 많다.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대한민국의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의 갈등이 생산현장에서만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사공간에서도 존재하며 가족 간에도 노동 인정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과 노동이 거대한 악에 침탈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명절 떡값일 수도, 조카를 보육하는 시간에서 노동자, 시민, 서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는 서로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여기에도 불평등한 구조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작가들이 표현하는 노동의 괴로움은 단지 경제적 괴로움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의 괴로움은 사랑의 괴로움, 종교의 괴로움, 가족 간의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계약노동자로 자신의 삶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 감정을 유지해야 하느냐라는?생각으로 이어진다. 내 삶의 지친 노동에 끝나지 않고 가사, 가족공간으로 피곤함과 끝없는 관계 속에 사람을 지치게 한다.
과도한 노동과 협소해진 생활을 버티게 하는 지친 육신과 마음은 언제 어디에 도착해 쉴 수 있을까? “청소나 하는 밑바닥 인생이 무슨 노동법 지랄하고 있네 일 시켜주면 감사해야”(엄마들, 청소용역업체 소장), “항상 빈자리를 메꾸는 자의 억하심정을 어찌 알겠나.”(오후 네 시의 생활력, 주인공의 나레이션) 만화책 속 글이 비수가 되어 눈을 찌른다. 아니 찌른다기보다는 눈 두덩이에 멍이 생길 듯한 느낌이다. 이런 멍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육체를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육체는 잔혹하고 슬프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몸으로 버틸 수밖에 없다. “나이는 들고, 이 집 한 채가 내전부인데…노후 준비도 못 하고 막막하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엄마들) 이 답없는 질문들 속에서도 소장과 반장의 모욕을 참아가며 묵묵히 청소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때로는 화장실 한구석에 앉아 훌쩍이더라도 삶의 노동을 감수한다. 그래도 그러다 보면 가끔 웃을 일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또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받아 생활을 이어간다. 이것이 가진 것 없는 자의 정치경제학 아닐까?
막막한 세상과 답?없는 나의 생계와 삶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하겠다. 그리하여 ‘오후 네시의 생활력’에 나오는 나즈막한 독백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람시의 낙관 이유보다 더 감동적이어서 이 글은 꼭 인용하고 싶었다.
“어느 순간, 공포는 잊고 몸으로 익힌다. 아이처럼. 아이들처럼. 모르겠다. 사랑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이지 않기 위해, 사랑을 한다. 살아 있으므로. 발 딛고 걷기를 거절당한 곳에서, 넘어서기 위해. 발이 닿지 않는 순간, 그 순간도 몸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말해주는 사람.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와 너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 서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일하려고 한다. 이 일하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낙관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두려움은 또 올 것이고. 그때도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바닥이 닿는 곳에 걸음을 다시 딛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