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웹툰으로 유명한 <송곳>의 대사이다. 인권이라고 하면 제일 처음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인권이라고 하면 따라오는 차별이라는 단어 때문이기도 하다. 2020년 코로나19 시대,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가 분주하게 바뀌게 되었다. 중위소득에 따라서, 가족 수에 따라서, 매출액에 따라서, 고용조건에 따라서 재난지원금이 지급됐다. 누가 가장 불행한가라는 물음은 불필요하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어른들은 출근하지 못했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강도는 심화되었으며, 택배노동자 또한 격무에 시달린다.
세상이 한순간 변했다. 사회복지라는 말이 멀게만 느껴졌던 국민 모두가 바이러스로 인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기초생활수급권, 긴급복지라는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실제 통계청이 발표한 1, 2분기 소득 가계수지를 보면, 소득 1분위에서 5분위 가구의 소득이 모두 감소했고, 특히 1분위 근로소득은 18%나 감소했다고 한다. 임시 일용직이 많은 1분위 가구 소득이 코로나19 상황에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대구쪽방상담소에서 쪽방 생활인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설문조사에서도 여실히, 비수급 쪽방생활인 92명 가운데 59명인 64%가 소득이 감소되었다고 응답했다.
그래서 묻고 싶다. 우리는 과연, 잘 숨 쉬고 있는가? 비록 마스크는 쓰고 있을지라도 내 생명, 내 숨통을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생명을 가진 인간이 생득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인데, 쪽방 생활인은 불안정 노동과 불안정 주거로 인해 이중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코로나19인권대응네트워크는 코로나19 상황 주거권 보장 가이드라인에서 소득이 감소한 세입자의 주거비가 총소득의 30% 미만으로 부담 가능한 수준이 되도록 보장하라고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퇴거 위기 가구가 공공임대주택에 임시로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긴급지원대상자’의 전세임대주택 보증금 자기 부담분을 5~2%로 하향 조정키로 했다.
1987년 10월 17일. 어린 시절 가난과 냉대 속에서 살았던 조센 레진스키 신부가 프랑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과 옷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다”고 외치며 ‘절대 빈곤 퇴치 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유엔은 5년 뒤, 이날을 빈곤퇴치의 날로 제정하게 된다.
빈곤이란 기아와 영양 실조와 같은 절대적 빈곤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 기본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의 제한, 사회적 불평등 및 의사결정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 소외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 사회적 거리두기인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누구도 쫓겨나지 않기를, 군림 당하지 않기를, 서러움이 없기를, 오늘도 배굶는 사람이 없기를. 당신과 나의 하루가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