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쳇말로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 갈 긴다’는 표현이 있다. 표현하자면 꼴도 보기 싫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4개월이나 남은 2020년이 그러하다. 개인적인 우환까지 보태보니, 나 역시도 2020년은 이미 오줌도 갈기기 싫은, 아니 오줌이라도 한 바가지 갈겨버리고 싶은 불쾌한 한 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푸석한 삶이 또 어디까지 밀려날지도 모르는 그런 암담한 상황을 버텨내고 있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이 1980년대에 주창한 ‘위험사회’(risk society)를 이제야 제대로 실감한다. 묵직한 성찰보다는 도구화된 합리성을 앞세운 근대화의 결과는 우리에게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인 근대화가 배태하고 있던 인위적인 위험의 징후들을 우리는 정말 인지하지 못했을까? 교통과 통신이 그리고 과학과 토목이 발전할수록, 이러한 위험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지구적인 위험을 불러온 코로나 사태의 피날레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며, 그저 마스크의 통치만 하릴없이 길어지고 있다. 더구나 일견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코로나 사태의 고통은 실상 계급·계층에 따라서 예외 없이 차등분배 되고 있다. 라이시(Robert Reich)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 재난 시대의 네 가지 계급을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와 ‘필수적 일을 수행하는 노동자’(The Essentials),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The Unpaid),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로 구분하면서, 이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도 안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백번 양보해서 코로나는 자연재해이고, 따라서 불가항력의 영역이라고 하자. 그러나 평범한 다수 대중의 결집된 비폭력적 압력으로 지배집단의 강고한 헌정질서를 정지시켜버린 ‘촛불혁명’을 치러낸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미리 말하지만, 적어도 제도적 수준의 민주화는 일정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믿어왔던 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실망스럽다.
현재 우리는 여러 곳에서 민주적 권리의 공고화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간을 침해하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목격하고 있다. ‘빨갱이 독재 정부’를 향하여 ‘반찬 투쟁’을 일삼는 ‘반독재 투사’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다. 80년대 거리의 투사들의 결기 어린 주장들이 이제는 코로나 검사조차 거부하는 ‘아스팔트 혐오부대’에 의해서 재현되고 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더 큰 민주주의를 통해서 해소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역설은 과도한 ‘정치의 사사화(私事化)’ 현상에서도 발견된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지적했던 것처럼, 사적 이익의 과도한 추구는 공적 이슈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을 저해하면서 정치의 사사화를 발생시킨다.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든 공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정치가 오히려 개인의 사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를 공적 영역의 범위로만 제한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사고임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도를 넘는 정치의 사사화 행위가 정당화될 명분은 없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서, (예비)의료인들의 조직적인 정치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공적 의료 강화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냉담했던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역대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이다. 그렇다고 의료인들의 ‘마이 웨이(my way)’는 공적으로 얼마나 정당할까?
(예비)의료인들은 의료라는 직업적 행위의 포괄적인 공적 속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보장받고 있지만, 당사자로서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당한 상황이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직능적 공공성을 그들의 사적 이익을 더욱 공고화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어설프지만 단호하게 정치세력화(?)하려는 행위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을까? 그들의 행간에서 수시로 발견되는 ‘전교 1등 능력주의(meritocracy)’의 자만조차, 그 단체의 대표가 강변하는 것처럼 ‘어떤 손상도 없이 구제받아야 하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일까?
여러모로 존재의 지속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마침내 코로나의 종언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의 수온 상승이 야기한 기상의 변화로 인하여, 장차 한반도를 향하는 태풍들은 예전처럼 오른쪽으로 휘어져서 무사히 지나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명 정치인이 자신의 추문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이 침묵의 강을 건너가 버린 후에 발생한 상황처럼, 사람들은 사회적 이슈를 둘러싸고 서로의 편견을 최대로 동원하면서 격렬한 대치를 지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작업장으로 내몰리는 수많은 ‘김용균’들은 태안의 바로 그곳에서조차 예견된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논쟁 중일 것이며,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과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자는 너무나 상식적인 ‘전태일 3법’의 제정도 요원할 것이다.
너무 비관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를 즈음에, 뜬금없이 한영애라는 가수가 부른 오래된 노래의 한 소절이 마치 주문처럼 기억 속을 맴돈다. “그래도 희망은 너와 내가 손잡은 사람에게 걸 수밖에,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게 마련이지.”
장차 우리의 삶은, 이런 위로만으로도 다시 유쾌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