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7) 문학을 해야 하는 시절이 왔다 / 황규관

15:39

문학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언제나 문학 자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 물음은 바깥으로부터 와서 문학의 관절을 분질러놓은 뒤 심장을 가로질러 문학의 어두컴컴한 지하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어둠을 댕댕 울린다. 지하에서 나는 그 울음소리에 작은 오두막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도망친다는 게 고작 얼마 전 헤어진 이를 떠올리거나 어릴 적 몸을 담그고 놀던 냇물에 몸을 부비는 햇볕에 이르러 실눈을 떠보지만, 그 물음은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고 끊임없이 답을 내놓으라고 한다. 답을 알 리가 있나. 몰라서 도망가기 바쁜데 그 심정을 당연히 알아주지 않는다. 묻는 일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해서 괴로움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언제나 문학 자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 물음은 바깥으로부터 와서 문학의 관절을 분질러놓은 뒤 심장을 가로질러 문학의 어두컴컴한 지하에 도착한다. (사진=pixabay.com)

한편에서는 한국문학의 눈부심에 놀라는 것 같고 한편에서는 한국문학의 가벼움에 절망하는 것 같다. 이 난감한 상황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처지로서, 그렇다고 딱히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모호한 상태를 벗어나 보고자, 말은 많은데 변죽만 울리고 있음을 상대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상대가 진의를 모르면 모를수록 말은 더 많아지니 이렇게 해서 내가 공범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셈이 되고 만다. 딱히 문학 공부에 열심인 적이 있었던가 되돌아보면, 내게는 사실 비판의 자격도 한참 부족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공범인 것은 어쨌든 뭔가를 써서 출판을 해왔고, 이런저런 심의에 참여를 했으며, 되지도 않게 한국문학의 일부 영토에 대해 발언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작 위기의식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문학 내부의 일 때문이라기보다 문학을 둘러싼 현실 때문이다. 문학과 현실이 분리된 게 당연히 아니고, 변화무쌍한 현실이 문학의 태도와 윤리와 언어를 규정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었기에, 요즘 현실의 어지러움에 문학의 책임도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른바 문학의 현실 참여가 이런 것이었나 하는 암담함이 급습할 때는 내 오래된 신념을 나도 모르게 뒤집어보게 된다. 뭐가 나오는가 보려고 말이다. 지금 쏟아지는 저 말들은 혹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은 아닌가, 지금 광장을 가로지르는 저 신념은 오래된 나의 것과 닮은 데가 없는가, 지금 범람하는 저 분노들은 예전에 내 안에서 요동친 것과 혹 같은 것일까, 하는 상념들이 술집 식탁 위에 한가득이다. 문학이 이런 현실에 책임질 게 있다면, 한국문학의 난감한 상태를 만든 공범인 나에게도 역시 책임이 있다는 뜻이 된다.

김종철 선생의 운명 소식을 들은 것은, 다른 일이 있어서 사무실을 청소하느라 약간 정신이 없을 때였다. 그 순간의 내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단지 개인적인 어떤 순간의 모습을 일일이 말하는 것도 별 의미 없는 일일 테다. 또 여기가 굳이 선생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마당도 아니다. 다만 선생 사후에, 꽤 오랫동안 안에서 맴도는 물길을 막고 있던 둑이 툭 터지는 느낌이 찾아왔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쾌감이었냐고? 당연히 그것은 고통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도 그 물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었는데,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그 물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것도 현실이었다.

비평가들에게는 꽤나 문학의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하는 성미들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무망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예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시가 어느 예술 장르보다도 교환가치가 떨어지니까, 즉 현실에서 무용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 말해지고는 하지만 나는 그 장담을 언제인가부터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이 그 입장에 확고하게 서 있었지만 지금은 물렀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동안 한 가지를 간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가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시를 쓰는 주체의 내면과 정신이 구체적인 현실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처럼 사물이 기호화되고, 장소가 획일화되고, 문화가 상품이 돼버린 환경이 시인들의 내면과 정신에 적지 않게 작용한다는 작은 진리를 놓친 것이다.

2011년 즈음인가 우리들은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의 중덕 해안가를 찾았다. 거기에는 지금은 해군기지가 만들어지며 파괴해버린 구럼비가 있었다. 구럼비는 폭이 60미터 정도, 길이가 1.2킬로미터로 알려진 거대한 용암바위인데, 울퉁불퉁한 형태를 띤 채 마치 수천 개의 바위가 모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거기서 (고작) 시낭송을 하고 구럼비를 걸어보기만 했지만 나는 뜻밖에도 구럼비에게서 큰 것 하나를 얻었다. 용암바위이다 보니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모습이 내게는 지극히 아름다운 현대 추상화처럼 보였다. 사실 추상이라는 것이 여러 구체적인 것들을 단순히 요약하거나 그것들을 초월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미술 이론은 잘 모르고 또 미술 이론과는 관계없는 생각이지만, 추상의 형태를 가지려면 구체적인 사물이 살아온 할 시간이 필수적일 것이다. 시간이란 개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내가 말하는 시간은 구체적인 사물이 맞은 사건의 총체를 말한다. 나는 구럼비의 표면을 허리 숙여 보면서 그동안 겪었을 파도와 바람과 햇볕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대로 살아온 강정마을 사람들의 발길을 생각했다.

오늘날 한국문학을 끌고 가는 작가들이 문학 바깥의 구체적인 세계와 얼마만큼 자주 그리고 깊이 만나는지 알 수 없지만, 불성실한 독서에서 얻은 느낌으로만 말해 보건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대도시를 벗어나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세상에 문학 바깥의 구체적인 세계를 작가들이 경험하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존재를 마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도시에서 얻은 긴장을 잠시 의탁하는 말 그대로 여행의 방식이었을 확률이 높다. 휴식을 위해 자연에 기대기는 하지만 자연의 영혼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영혼을 바라볼 때 자연의 영혼도 비로소 우리의 영혼을 마주 보는 법이며,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영혼이 보태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 자연의 영혼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자연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근대 문명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앎은 우리에게 효용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앎은 결과만을 수취하는 정신의 상태를 그치지 않고 자극하고 또 장려한다. 앎 자체가 결과이기도 하며 우리는 그 결과물로 삶을 꾸리는 많은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앎으로 세계를 판단하고 규정하려 한다. 그리고 세계는 자신들의 앎에 굴복해야 하고 그래야 맞다. 나는 이게 앎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계는 근대인의 앎 따위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깊어지며 심지어 어떤 파괴를 준비하기도 한다. 지진은 지진이 지리적으로 일어나는 곳에서만 일어나며, 전염병은 경제성장이 미흡한 가난한 나라에서만 퍼진다. 이게 근대인의 앎이 세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고, 그에 입각한 말들이 변종을 일으키며 온갖 매체를 점령하고 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정말 문학이 필요한 때이고 문학을 해야 하는 시절이 왔구나, 혼자 중얼거리게 된 것은 이런 현실 인식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식의 착오는 있는 법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리고 불필요한 변명 같기도 하지만, 이 인식의 물길이 내게 번개처럼 온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사건과 내가 저지른 오류들로부터 아마 그것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길의 시작은 작은 옹달샘이었을지 모르지만, 작은 옹달샘도 바다로부터 대기를 거쳐 지하수로 스며든,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흐르고 해찰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단지 실존이기에 그것을 가능케 한 사건들의 종합, 즉 총체적 진실에 대해서는 가만히 상상해볼 뿐이지 언어화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게 시의 원리와 비슷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제 정말 문학이 필요한 때이고 문학을 해야 하는 시절이라는 명제는 문학이 어떠해야 한다는 해답을 미리 가지고 있지 않다. 어쩌면 새로운 출발선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이제 운동으로 삼아보자고 누구에게도 권할 생각이 없다. 이미 그럴 시간은 지났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엄청난 시간의 전조인지 뭔지 자신 있게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 시간마저 잘 살 수 있게 하는 다른 윤리와 태도를 촉구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여기에는 물론 인류가 그동안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일들에 대한 투쟁도 포함된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이 새삼 문학인 것이며, 여기서 뒷걸음치면 끔찍한 야만의 시절을 살 것 같은 예감이 떠나주질 않는다.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