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5) 쓸모의 함정 / 황규관

19:21

철학자 하이데거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항의하며 사직한 전 총장의 후임으로 1933년에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인식하고 취임한 꼴이다. 전 총장의 사직은 대학에 가해지는 나치스의 압력에 대한 항의였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 자체가 나치에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신이었다.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는 그의 철학적 명성에 누가 되었던 게 사실인데, 그것은 순간적인 정치적 오류가 아니라 그의 철학과 현실 인식이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

히틀러 개인에 대한 매료에서부터 그 당시 독일 대학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독일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에 해당하는 근대 기술 문명의 극복을 위해 나치 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얼마 안 가 나치에 대한 환상은 버렸지만, 나치 참여에 대한 이러한 자기 나름의 철학적 근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66년 9월 23일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공산주의 운동”도 “전지구적인 기술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고 밝혔듯이 하이데거는 사회주의 근대에 대한 혐오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제자 마르쿠제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질문에 하이데거는 “유태인 학살과 관련하여 나치를 비판한다면, 그러한 비판은 유태인들이란 단어를 ‘동구의 독일인들’로 바꾸어놓을 경우 연합군들 중의 하나(소련)에게도 타당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르쿠제는 스승과 대화를 포기하는 듯한 말을 남긴다. “선생님은 서로 간의 대화가 가능한 이성적인 차원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이데거가 총장직을 그만두자 후임으로 부임한 총장은 대학교수를 당과 협의해 ‘전혀 불필요한 교수, 반쯤 필요한 교수, 필요 불가결한 교수’로 분류했는데 하이데거는 ‘전혀 불필요한 교수’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나치와 더 이상 동행하지 않기로 하자 곧바로 전혀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희덕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 실린 작품 ‘어떤 분류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시인은 이 작품을 “자본주의라는 장갑을 낀 손으로 교수를 감별”하는 현 대학의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썼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다. “K는 하루하루 진화하고 있다 / 반쯤 불필요한 교수에서 전혀 불필요한 교수로”. 시의 결구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김해자의 시집 <해자네 점집>에 실린 ‘무용Useless’이란 시는 생산 과정을 은폐한 채 교환가치로만 유통되는 자본주의 상품 경제 사회가 “효용이 아니라 결국 메이커를” 파는 지경에 이르는 가치 전도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무용과 / 약간의 무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김해자 시인에게 그렇게 되기 위한 길은, 새로운 삶의 유형에 대한 사유다. 시인이 독자에게 건네주는 그 사유의 감각적 등가물은 “더 쥐어 주려는 까만 손과 동전을 돌려주려는 / 굳은 살 박인 손”이다.

두 시인은 공통적으로 무용한 존재-되기를 말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날 ‘유용’은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능력을 인정받는 것으로써 보증된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자신이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 ‘유용’으로 인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 ‘유용’이 ‘존재 그 자체의 역량’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유용’한 사람의 능력은 현실에 잠시 맞은 것일 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 능력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유용’이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은 곧잘 까먹으며, 현실에서 유능이 현실의 부조리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하지만 “좋은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노자> 31장)이기도 하다.

문학이 무기이기도/여야 했던 적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 근대문학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든 저항적 자세든 취하면서 진행될 운명이라는 인식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근대문학 종언’ 담론은 문학이 이 역할을 언제부터인가 포기해서 발화된 것이지 비판과 저항의 책무를 벗겨주려고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이 어찌 되었건 근대문학의 종언은 재빨리 시장에서 수용되었다. 도리어 근대문학의 종언이 문학의 상품화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것은 다시 야금야금 작가들의 무기력한 내면이 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비판과 저항의 화석화로 나타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상인 듯한데, 특히 문재인 정부 출발 이후 문학의 현실 정치화는 자못 심각하다는 게 내 입장이다. 문학과 현실 정치의 변증법적 관계는 무시되고, 문학에서 말하는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무시로 인해 곳곳에서 씁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시장에 투항하는 현상이 깊어질수록 문학의 현실 정치화가 그 짝패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문학의 ‘정치 혹은 현실 참여’가 언제부터 특정 정치인 또는 정파에 대한 지지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장에 투항하는 ‘문학의 시장화’와 정치에 대한 상상력 부재가 가져온 ‘문학의 정치화’는 공통적으로 문학의 ‘유용성’을 알게 모르게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무용한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혼돈을 겪을 수 있다. 문학이 시대에 따라 그 속성을 바꾸거나, 다른 명제를 제출하는 것은 어쩌면 (다른 예술 분야는 논외로 치더라도) 문학이 민주주의와 친연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문학이 구체적 감각과 감성을 통해 규제적인 보편성을 거부하면서 다른 보편성을 추구하는 성질을 갖기 때문에 성립되는 명제다. 구체적 감각과 감성은 기존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위협하면서 사건을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비(非)-존재들이며, 정치적으로는 소수자의 위치를 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도 결국 역사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학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데 비해, 문학이 민주주의와 친연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여기에서 다시 여러 의견들이 제출되며, 우리처럼 여러 정치적 굴곡을 가진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학의 정치화’가 민주주의를 가장 앞에 세운다는 점도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자체도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때 문학과 정치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의 역량이 감당 못 할 부분이다.

다만 문학이 무용한 것인가, 유용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또한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앞에서 말했듯 문학의 유용성이 상품으로 증명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소설의 경우는 시작부터 시장에 의존해야 했지만, 문제는 시의 경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시인들에게 한 권의 시집이 상품이 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서 시가 자본주의에 마지막까지 적대적일 수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확실히 시는 상품으로서 별로 매력이 없다. 다만, 일부 시인들이 가진 상징자본은 상품이 될 수 있다.

정도의 문제이긴 하나 시인들이 사회적 상징자본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늘날에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 같은 일이 일부 벌어지고 있다. 사실 시의 현실 정치화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이것은 시의 특성이라기보다 소셜미디어가 갖는 특성에 가까운데, 어지러울 만큼 다양해진 매체 환경은 그에 적합한 권력 구성을 촉진하기 마련이다. 언어에 적합한 매체 환경이라면 거기에서 시인이 불리할 것은 없다. 하지만 시인의 현실 정치 참여와 시의 정치는 동일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느 지점에서 두 가지가 동일화되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 동일화의 효과는 시인의 현실 정치 참여가 마치 시의 역할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시가 현실 정치에 유용할 수도 있고 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국면과 맥락인데, 그 국면과 맥락을 ‘보다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시가 그나마 갖고 있는 유용성의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려는 부단한 몸짓을 가질 때이다. 무용하기 위해서, 즉 쓸모없기 위한 운동을 할 때만 순간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운동은 시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엄중한 현실이다. 시인이 시의 주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시인은 쓸모없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는 시의 들판이 되어야 한다. 시는 (시인의) 삶이라는 들판에서 일어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실 정치 참여가 실패하다 못해 결국 오점으로 남은 것은, 자신의 철학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유용할 것이라는 오만 때문일 수도 있고, 앞에서 말한 구체적 국면과 맥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물론 역사의 소용돌이 복판에서 자신의 시대를 명확히 인식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나름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자신의 실존 조건, 즉 학문적 성공으로 말미암은 독일 내부의 지위와 명예가 하이데거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이데거의 선택은 불가피하게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쓰러진 베냐민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베냐민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 이전부터 어떤 파국을 예감하고 있었다.

문학의 정신과 마음이 현실에 곧바로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지푸라기 같은 유용함일망정 자꾸 쓸모없음으로 만드는 운동 속에서 문학과 현실 정치는 언제나 ‘새로운’ 긴장 관계에 처하게 되는데, 이 긴장 관계는 우리가 상투적으로 말해온 그런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여기까지만 말해두기로 하자. 아직은 이 긴장 관계 이상을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