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회에서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가 있었다. 몇몇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팻말을 든 채, ‘한쪽 무릎 꿇기’를 한 것이다. 이 동작은 최근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인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상징이다.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환영할만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웬걸, 그들이 발의하겠다는 차별금지법에선 성소수자를 뺄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간 차별금지법 논란 초점이 ‘성적 지향’에 지나치게 맞춰져 당장 차별·억압에 시달리는 여성 등의 인권을 챙기지 못했다”며 사회적 합의가 쉬운 부분부터 일단 발의하겠다는 것이다.1
미래통합당이 여성 인권 문제를 챙기겠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따르면 성소수자는 여성이나 장애인과 다르게 당장 차별·억압에 시달리지 않는 집단이고 소위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권을 부여받아도 괜찮다는 것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총 7번2입법이 시도되었으나 아직 제정되지 않은 법이다. 이 법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차별은 나쁜 것이고 사라져야 한다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외에도 ‘포괄적’이라는 단어에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여야 거대 정당들은 오랜 기간 보수 개신교의 반대를 근거로 삼아 ‘사회적 합의’가 될 때까지라며 법 제정을 차일피일 미뤄왔고, 또 바로 그 점 때문에 제 인권사회단체들에서는 아무리 여성 인권이 급해도 혹은 아무리 이주자 인권이 급해도 성소수자 인권을 뺀 채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던 법이지만 일부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가 주요 논점으로 보도되어 왔기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에 애쓰는 단체들은 다 성소수자 단체인가보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왜 다른 소수자 단체들이 자기 이익을 포기한 채 10년도 넘게 이 운동을 같이하겠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힘써왔던 단체 중에는 성소수자 단체 외에도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많은 인권사회단체가 있으며 이들은 여전히도 성소수자를 제외한 입법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인간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할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대놓고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또한 인권은 어떠한 유보나 제약 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회적 지위나 특성에 따라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권에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인권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이러한 이상적인 생각이 인간사에서 정말 온전하게 실현된 적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이 이상적인 인권 개념을 현실에서 부단하게 구가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인권이 언제나 이전 시기에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의 확장은 해당 시기마다 차별구조를 철폐하려는 소수자들의 부단한 투쟁 속에서 그 이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 중 누군가의 권리를 자꾸 뒤로 미뤘을 때 그것은 새로운 차별구조로, 심화된 사회적 불평등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대구시 최초로 시민 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종합적인 인권 관련 설문조사인 2019년 대구인권의식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 시민들은 장애인, 이주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 북한이탈주민, 성소수자, 난민 등 사회적 소수자 가운데 성소수자와 난민의 인권이 가장 보장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동시에 소수자집단과 사회적 거리감을 물었을 때 성소수자와 난민에 대해 가장 거리감을 멀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성소수자나 난민의 인권실태가 열악함을 방증하며 이 집단에 대한 적극적인 차별 실태 파악과 인권의식 개선 사업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가장 차별을 많이 받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을 빼놓고 제정하는 차별금지법? 형용모순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며 동성애를 혐오할 자유를 달라는 일부 보수 개신교의 주장은 굳이 논박할 가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최근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이 심대하게 왜곡되면서 혐오사회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그 개념의 탄생 배경을 상기할 필요도 있겠다. 표현의 자유는 근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정에서 탄생한 권리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신흥 부르주아 세력들은 기존 왕권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유주의를 내세우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도전에 위협을 느낀 왕은 새로운 사상을 탄압했고 이에 저항하며 부르주아 세력이 내세운 가치가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표현의 자유가 천부인권의 반열에 올라가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는 발생 초기부터 왕(국가)의 억압에 맞서는 부르주아(비국가, 시민사회)의 저항 논리로서 권력 관계에 대한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3
표현의 자유가 제기되었던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망각한 채 ‘모든 표현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실의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표현을 독점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한 표현이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 표현을 제한당하거나 존재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애초에 표현을 억압당한 자들의 권리이다.
이태원 클럽의 코로나 발생 이후 확산되던 혐오의 말들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권리였나? 과연 현재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누구인가? 성소수자 혐오를 거침없이 쏟아내어 우리 모두를 감염의 위협 속에 빠뜨린 사람들인가? 아니면 감염 우려 속에서도 차별과 혐오의 공포가 더욱 크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지난달 23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는 코로나19로 인해 국민의 차별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졌으며,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 제정에 다수가 공감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응답자 천 명 중 91.1%가 ‘코로나19를 계기로 나도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차별금지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는 답변 역시 88.5%에 달했다. 더 이상 ‘사회적 합의’ 운운하며 제정을 미룰 수 없는 수치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과거 회귀의 열망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욕망이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다시 이전처럼 일상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토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위기의식 속에 더 효율적인 비대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자본·기술중심적인 해결책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 이 둘 사이의 진동을 멈추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성찰을 시작할 시간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전쟁과 전염병 같은 상황은 사회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곤 했다. 코로나19로 대다수 시민은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안위가 내 안위와 직결됨을 깨달았고, 평등과 연대의식에 기초하지 않은 사회는 결국 절멸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갈림길에 놓였다. 우리는 다시 이전과 같은 불평등한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 “민주당이 외면한 차별금지법, 통합당이 발의한다” 「조선일보」 (‘20.6.28)
- 1차 차별금지법안(정부) 2007.12.12
2차 차별금지법안(노회찬) 2008.1.28
3차 차별금지기본법안(박은수) 2011.9.15
4차 차별금지법안(권영길) 2011.12.2
5차 차별금지법안(김재연) 2012.11.6
6차 차별금지법안(김한길) 2013.2.12
7차 차별금지법안(최원식) 2013.2.20 - 박석진(2010), “표현의 자유,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 ‘차별금지 대 표현의 자유’ 대립을 넘어.” 『차별금지법, 여성 가지 이유 있는 걱정』, 올바른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쟁점포럼 반차별공동행동자료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