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고, 집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절 놀이집단은 동갑끼리가 아니라 동네 형과 아우들이 뒤섞인 무리였다. 나이가 차고 힘과 기술이 붙으면 서로 편을 먹으려 들지만, 나이 어린 조무래기가 끼려면 붙여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버텨야 했다. 붙여줘도 처음에는 그저 왔다 갔다 쫓아만 다니다 말기가 십상이고, ‘깍두기’란 이름이라도 얻으면 그나마 반쯤 인정받는 셈이었다.
그런 상태가 싫었던 것 같다. 뉘라서 딱히 더 환영받거나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환영받지 않는 느낌, 내 자리가 아닌 상황을 버틸 자신이 없어서, 아예 쫓아다니지를 못했다. 그 후 못난 사회성에 다소간 개선이 있기도 했지만, 어릴 적 모습이 나만 타고난 결함 같은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서인지, 그때 왜 그랬는지 가끔 생각해볼 때가 있다.
어쭙잖은 개인사를 최근 다시 떠올린 것은 코로나19 사태 초반에 겪은 일 때문이었다. 한창 대구지역 확진환자 수가 폭증하던 무렵이다. 몇 달 전 약속한 2월 말 연구회 모임을 앞두고 전화를 받았다. 모임 참석이 가능한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는데, 마침 급한 학과 회의가 같은 날 잡혀서 연구회에 가지 못할 형편이었다. 학과 내 ‘짬밥’도 낮고 개인 선약을 내세우기 어려움을 들어 한참 양해를 구했는데, 뭔가 대화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며칠 후 모임 취소 전체메일을 받고 깨달았다. 요는 내가 불참해서 죄송할 일이 아니라, 참석하면 오히려 우려의 근원이 되는 상황이었다. 모임 취소는 적절했지만, 오랜 교류가 있는 관계임에도 이런 느낌에 놀랐을진대, 사업적이거나 위계적인 만남, 서먹한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싶어 씁쓸했다.
직업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불편한 이야기지만 본능처럼 직업적 흥미를 느낄 때가 있다. 일소를 부려 농사짓던 시절 경기남부 농민의 영남소 선호, 호남소 기피 현상도 그중 하나다. ‘일 잘하는 영남소’ 담론은 조선후기 전적에도 나오는 흥미로운 민간전승인데, 문제는 현실 농촌에서 호남소 기피, 나아가 호남인 차별과 딱 붙어 등장한다는 점이다. “호남소도 일 잘하는 소가 있지만, 사람을 (들이)받아. 거기, 사람도 그렇잖아?”라는 식이다.
강원도 소에 대한 평은 이보다 이중적이기는 하지만, 낮잡아보기는 마찬가지다. “산골에서 맨날 칡뿌리 이런 거 먹다가 여기 와서 죽 끓여주면 살이 버쩍버쩍 붙는다고. 힘은 좋은데 미련해. ‘강원도 감자바우’라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지.” 학술적 욕심에 구술은 수집하지만, 제삼자로 듣기에도 얼굴이 벌게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말들이다. 당사자라면 어떨 것인가. 코로나19 와중에 아시아 혐오가 불거지고, 대구경북 기피 담론이 종종 기사화되는 현실이다. 내 얘기가 아니어도, 남의 일도 아니다.
코로나19와 관련해 몇 차례 더 이 환영받지 않는 느낌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음번은 다소 엉뚱하게 동식물, 그리고 지구환경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전 세계로 바이러스가 퍼지고, 사회적 격리가 보편적 생활양식이 되며, 산업ㆍ이동 등 인간 활동이 침체하자,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세계적 산업국가 초거대도시 상공의 대기오염이 걷히고,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의 해변도로에는 바다사자가 일광욕을 즐기러 올라왔으며, 칠레 산티아고 거리에 퓨마가 활보했다. 내가 사라지자 잔치판을 벌이는 그들 앞에서, 대체 나의 존재란 무엇이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있는 강심장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일 것이다.
당연히 문제도 나타났다. 원숭이 사원이 있는 태국의 도시 롭부리에서 관광객이 줄어 먹이 수급에 타격을 받은 원숭이 떼가 광장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지구 곳곳 가까운 바다 바닥에 마스크 퇴적물이 쌓이는 식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4월 내 아침저녁으로 불던 차가운 바람과 황사ㆍ미세먼지 감소로 설왕설래가 있었다. 미세먼지의 주범이 중국임이 확인되었다며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부류도 있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이 마당에 존재의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큰소리 낼 형편은 아니다.
롭부리의 원숭이 떼가 그처럼 불어나 광장에서 패싸움까지 벌이게 된 배경에 인간의 관광경제가 있는 점까지 생각하면, 지구환경과 동식물에 인간은 여러모로 반가운 이웃이 아님이 확실하다. 이 상황에 책임과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닌데, 이 모든 상황이 인간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묘한 위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뭐 달라질 게 있겠어?’ 싶다가도, 코로나19 이후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당선자 소속 정당별로 칠해댄 대한민국 지도를 보며, 반가운 이웃, 환영받는 자리, 초대받은 존재에 관한 유사한 위치 감각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혹자는 영남 이외의 파랑이, 혹자는 영남의 분홍이 불편했을 텐데, 어느 쪽이든 진정 상대가 반가운 이웃이고 이 자리가 나를 환영할지 의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진행되는 코로나19 대구경북 회피·비판 담론이 한반도 정치색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도 우리 모두 잘 안다. 그러나 결과의 확연함은 구성의 미묘함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애초에 파란 지역에도 분홍 표가, 분홍 지역에도 파란 표가 많았거니와, 보도에 따르면 총선 후 영남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오른 모양이다. 그것이 올라서 좋다 나쁘다는 (이 역시 일시적이기 마련인 결과의 차원일 뿐이므로) 논외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투표로 무언가를 표현하려 버텼고, 선거가 끝나자 어느 정도 거기에서 풀려나는 모습을 그려봤는데, 희망 섞인 오버센스일지도 모르겠다.
선거 결과 보도 중에는 색깔 지도 외에 세대교체를 지적한 그래프들도 있었다. 586이 50대 전역을 차지함에 따라 나타난 비가역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직장 등 사회 도처에 존재하는, 50대와 30, 40대 간 생활문화, 조직양식, 사회철학의 차이를 괄호 쳐 생략할 때만 유효한 이야기다.
아래 연령대에서 이런 면을 봤을 때 지금의 50대는 자신들보다는 그 윗세대와 훨씬 닮아있다고 한다. 10대와 20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시간 흐름과 세대교체에 따른 정치이념 교체는 비가역적 결과를 산출하고 끝났기는커녕 이제부터 시작이다. 물론 세대 차이라는 현상 역시, 지도나 그래프처럼 결과의 한 표현방식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생물학적 연령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전투가 그 구성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많은 세대 간 문화 전투의 현장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마지막으로 이 문화 전투와 관련하여, 선거 국면에서 범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세력의 전유물처럼 흘러버린 정치적 고지들, 가령 재난지원금, 검찰개혁, 청년정치, 종부세 등은 각기 기본소득, 권력구조개혁, 포스트 586 주도권, 부유세 등 범주로 확대되어, 범보수(도 있다 치고)의 분점과 경쟁이 가능하며 또 필요한 이슈들인 점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선거 국면에 그리 부각 안 된 기존의 잠재 이슈들, 생활문화기본권 확립, 납세·국방의무 개편, 환경변화 대응, 사회보장 재설계, 탈-생산·소유와 사회ㆍ공유경제 강화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이들 이슈가 국가와 지방이 경쟁 가능한 것들이자, 그 대부분이 우파 경제의 세계적 브레인인 IMF도 권고하거나 주목하는 내용이라는 점도 기억해둘 만하다. 사회구성원 전체를 환영하는 자리를 만들고, 모두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또 다른 길머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보면, 초대받은 잔치, 초대한 사람은 있어도, 초대받지 않아 못 가는 잔치, 초대하지 않아 못 올 사람은 없다. 나의 어릴 적 문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을까? 정답. 여하간에, 우파 이념과 정책이 세련되어야 좌파의 그것도 예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여러모로 보수우파의 의식 개방과 분발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