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투명인간, 관음 그리고 N번방 ‘인비저블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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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반지를 얻은 목동 지게스는 왕비와 공모해 왕을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다. 2,400여 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저서 <국가론>에서 언급한 투명인간 이야기다. 플라톤은 “안전하게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면 선한 인간은 불의를 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1887년 영국작가 H.G. 웰스의 소설 <투명인간> 줄거리는 육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약품을 발명한 과학자가 이를 악용해 재산과 권력을 잡으려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끝내 궁지에 몰려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2000년에 개봉한 <할로우 맨>도 투명인간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가 자신에게 잠재된 악한 본성에 지배된다는 서사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윤리의 관점에서 인간이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이다. 잠재된 욕망으로 정체성을 잃고 파멸로 치닫게 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소재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상인 탓에 공포감이 크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비저블맨(The Invisible Man, 2020)>은 현실적 공포를 자아낸다. 보이지 않는 가해자의 은밀한 욕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에 쫓기는 피해자의 불안과 공포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인비저블맨>에서 마법의 반지나 약품, 실험을 통해 투명인간이 되는 과정은 없다. 투명인간은 폭력의 수단일 뿐이다.

‘유리로 만든 집’에 사는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는 남편 애드리안(올리버 잭슨코헨)이 잠든 틈을 타 새벽에 몰래 집을 나온다. 호화로운 저택 구석구석에 CCTV가 달려 있다. 남편은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애드리안은 세계 최고의 광학 기술 연구자다. 그는 편집증적이며 강압적이다. 세실리아의 옷차림과 식성을 비롯해 사고방식까지 통제하고, 강제로 임신 시켜 자신의 공간에 가두려 한다.

세실리아는 여동생 에밀리(해리엇 다이어)의 도움을 받아 탈출해 경찰인 오랜 친구 제임스(알디스 호지)의 집에 은신한다. 가까스로 남편에게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남편의 추적이 두려워 불안에 떠는 세실리아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간신히 문을 열고 몇 발짝 내딛지도 못하고 금세 겁에 질려버린다. 그러던 중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다만 세실리아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을 경우에 한해서다.

시간이 흐르고 세실리아는 일상을 되찾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허공에서 남편의 숨결과 눈길이 느껴진다. 자신만 느끼는 인기척에 공포심은 극대화되지만 아무도 이를 믿어주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폭행을 당하고,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믿어주는 이는 없다. 남편의 존재를 호소할수록 세상은 세실리아를 정신병자로 몬다. 고립된 세실리아는 끝내 투명인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대상과 맞선다.

<인비저블맨>의 서사는 위협받는 약자의 시점으로 전개하면서 투명인간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이 전부다. 여타 공포물과 비슷한 관점으로 본다면 진부한 스릴러로 그친다. 하지만 <인비저블맨>은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의 존재보다 어디서든 나를 몰래 볼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한다. 투명인간이 무서운 건 그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영화는 관음의 현실 공포와 맞닿아 있다. 피해자는 익명성을 이용해 성 착취 영상을 돌려보는 N번방의 그들을 어찌할 수 없지만, 그들은 자신을 가린 채 누군가의 고통을 훔쳐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공간에 있는 그들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익명으로 정체를 가린 그들이 누군가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다른 이의 행복한 순간을 힐난하면서 사이버 성폭력을 날린다. 다른 이로 둔갑해 거짓된 사생활 정보를 퍼트리기도 한다. 마치 영화 속 투명인간처럼 자유롭게 마음껏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에선 피해자가 복수에 성공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가해자는 숨고 피해자는 왜곡된 시선을 받게 된다. 피해자만 경험하는 폭력은 증거가 되지 않는 게 요즈음 현실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가해자의 끔찍한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호소와 절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가해자로 고통받는 또 다른 피해자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