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득재 민중행동 공동대표가 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의 재반론 ‘우리는 동지다’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에 대한 논의와 토론이 활발히 벌어지길 기대합니다. <뉴스민>은 진보적 담론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모든 글을 환영합니다. 두 분의 토론 가운데 다른 의견이 있는 독자들의 기고를 기다립니다. newsmin@newsmin.co.kr
[이득재 공동대표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우리는 동지다?(11월 26일, 함종호)
전태일의 손가락을 볼 것인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볼 것인가?(11월 23일, 이득재)
전태일 기념식·문화제 유감’ (11월 9일, 함종호)
재재반론을 써야 하나 고민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언어 자체가 그런 한계를 갖도록 만들기도 하고 이론적인 혼란이 개입하기도 하며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결국 표현되지 못한 채 사장되기도 하면서 이해를 방해한다.
궁극적으로 함종호 부이사장 글의 저변에는 ‘노동운동, 너희들, 왜 시민운동 및 사회운동과 분리되어 자본 앞에서 분열을 재촉하느냐’는 의식이 깔려 있다. 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 모두 시민사회 안에 통일된 것인데 노동운동을 사회운동 및 시민운동과 다른 층위에 있는 것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경제주의요, 노동주체성의 해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함 부이사장은 헤겔, 맑스, 그람시, 알튀세르, 발리바르, 라클라우·무페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 및 탈노동까지 언급한다. 숨가쁘다. 결국 노동운동은 탈노동에 이른다는 것이다. 글 맥락은 그렇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세 층위의 분리 탓이라는 것이다.
함종호 부이사장의 글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이율배반이 드러나 있다. 이런 것이다.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 훌륭한 활동가도 많다. 이들을 중심으로 반자본 운동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시민사회 기본 갈등인 노동과 자본의 갈등을 대표하는 노동운동이 주체가 되어,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어서 더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곳으로 향도하는 것이 올바르다. 이것이 바로 ‘노동주체성’이다”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 세력은 노동자계급이어야 한다”
이 충돌 지점에서 필자는 망연자실해진다. 어쩌라는 것인가? 반자본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노동자계급인가, 아니면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안의 훌륭한 활동가인가? 도대체 누가 주체라는 것인가?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안에도 훌륭한 활동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이들을 중심으로 반자본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 주체가 될 정도의 역량은 갖추지 못했지만, 반자본운동 주체이자 당사자는 전체 노동자다. 시민이 자본주의적인 착취의 대상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을 중산층으로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은 지대수탈을 하는 계층 아닌가? 함 부이사장은 “그러니 시민운동은 굳이 노동중심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을 곡해하여 “사실상 노동주체성에 입각한 시민사회전략을 해체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필자가 운동의 각기 다른 세 가지 층위를 이야기한 것은 시민운동이 노동착취의 당사자 운동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고자 했다. 그것이 “굳이 노동 중심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라는 뜻이다. 함 부이사장은 노동운동이 시민사회 안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사회운동 및 시민운동과 연대하여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동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런데 “3개 층위의 운동은 모두 시민사회에 속한다”는 전제 위에 “노동운동을 시민운동, 사회운동과 다른 층위로만 이해하는 것은 바로 경제주의 노동운동 개념의 전형이다”라고 말한다.
경제주의라니? 경제주의(?) 노동운동이라도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세 가지 각기 다른 층위의 통일이 과연 가능한가? 각자가 자본 대 노동의 헤게모니가 아니라 운동의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실은 또 어떤가? 세 가지 각기 다른 층위의 통일 운동의 실체는 -경제주의는 아닐 터이고-무엇인가?
90% 노동자들이 노조도 없이 자신의 경제적 권리를 향상하기 위한 교섭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것이 경제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을 일인가? 필자가 말하는 경제투쟁은 노조에서 벌이는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등의 투쟁을 가리킨다. 전태일 시대나 지금이나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으며 근로기준법이 좀비화되어 가는 이때, 일반해고 행정지침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근로기준법을 해체하려고 하는 이때 노조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함 부이사장이 말하는 경제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노동운동이 왜 시민운동을 안 하느냐, 혹은 왜 시민운동을 껴안지 않느냐는 비판인가? 경제결정론에 빠졌다는 비판인가? 누가? 한편으로는 시민운동, 사회운동 활동가를 중심으로 반자본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노동운동이 주체가 되어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당착처럼 함 부이사장이 말하는 경제주의 또한 자가당착이나 혼란에 빠진 것 아닌가?
노동운동이 임금협상 등 노동‘조합주의’를 벗어나고자 그 안간힘을 쓰며 ‘경제주의’(?)를 탈피하여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노동주체성의 해체라니? 경제투쟁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그 한계를 벗어나 노동운동으로 나아가려는 그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는 활동가들을 ‘경제주의’라는 한 단어로 뭉개고 헐뜯어서는 안 된다.
함 부이사장 자신이 말하는 ‘노동주체성’은, 세 가지 층위의 통일이므로 함 부이사장 처지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것은 노동중심성이다. 노동중심성은 자본주의 사회 안의 자본 착취구조와 이에 저항하는 노동의 적대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것을 더더욱 강조하게 되면 함 부이사장에게는 노동중심성이 노동주체성으로 변하게 되고 노동주체성의 해체로 이어지며 자본 앞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결국, 각자 운동하다 보면 자본 앞에서 모두 패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자. 노동운동하다가 시민운동으로, 제도정치 운동으로 나간 것이 무슨 결과를 갖고 왔는가? 그것을 두고 ‘배신’ 운운할 것까지는 없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한 운동들이 지역노동운동에 부정적인 결과를 갖고 온 것 아닌가?
각기 다른 층위의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노동운동 중심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세 가지 층위의 통일을 위해 시민운동 및 사회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이 질문은 타박하자는 것이 아니라 함 부이사장이 노동주체성 해체를 이야기하기에 던지는 말이다.
지금도 내년 총선을 위해 다는 아니지만, 제도정치 영역으로 편입되거나 편입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운동 안에서 세 가지 다른 층위의 역량이 지역사회 안으로 총결집되었다면 반자본운동이 지금 같은 수준에 머물렀을까? “자본 앞에 분열되어 파편화한” 것은 운동을 떠나 국회로 편입해간 사람들과 단체에 있지 노동운동의 경제주의 탓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필자에게 추호도 없다. 그것은 개인의 결정에 대한, “다른 세상에 대한 월권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가지 층위는 각각 다르다고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월권’이 “경제주의의 극치”라니?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에 매달려 시민운동을 부정한다는 것인지 수탈의 현장에 무관심하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아니면 “ 치열한 ‘투쟁’에 비해 보편적 계급에 걸맞은 ‘정치’적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노동운동의 치열한 투쟁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래서 경제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정당 운동을 해야 정치적인 것이라면 정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노동운동도 계급갈등이지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지배 내에서 지위를 높이는 데 만족하는 수준이다”라는 노동운동에 대한 몰이해나 폄훼가 뒤따르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니?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부르주아 지배 내에서 지위를 높이는데 안주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에 묻힐 수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 변혁이다.
이러한 오해와 이율배반적인 충돌의 근저에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함 부이사장은 시민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이해하는데 왜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로 표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시민사회 안의 기본갈등이니 자본 대 노동의 갈등이니 하는 표현은 그래서 나오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자본주의사회 안의 자본 대 노동의 갈등이라면 모르겠으나, 선뜻 동의되지 않는다. 사회라는 말이 애매모호하여 하버마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계급갈등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알튀세르 또한 절합articulation 개념을 통해 운동의 영역들을 사고했지 언제 병렬식 운동을 이야기했는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시민’사회 이야기를 하면서 왜 발리바르 이야기가 튀어나오는지도 이해되지 않지만 세 가지 층위의 분리가 탈노동을 지나고 그 결과로서 노동주체성의 해체를 지나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주의운동을 발본적으로 밀고 간다면 결국 좋은 세상이 온다는 전략”은 노동운동의 중심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운동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반자본운동이기 때문이다. “노동주체성이 아니라 각각의 운동들이 수평적으로 연대하여 민주주의를 위해 연합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전략은 시민사회의 기본 갈등인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희석화하여 개별 집단의 ‘경제적 요구’나 ‘부분’별 이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이해되지 않는다.
함 부이사장이 말하는 노동주체성이란 각각의 운동들의 수평적 연대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연대가 개별적인 요구로 환원되고 노자모순을 희석화한다니? 이건 무슨 말일까? 자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독재가 횡행하는 지금 민주주의를 위해 연합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자본은 민주주의를 알지 못한다.
노동운동은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이 결속해나가는 계기”는 충분히 수용한다. “시민사회에 대한 노동의 헤게모니 강화”는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고 합의가 된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각자의 길은 다르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역운동, 전국운동에서 운동들의 절합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 민중 연대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지는 투쟁의 현장이 공장이든 거리든 하늘이든, 같은 길 위에서 만날 때만 동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