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감염병 확산과 함께 시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단체가 있다. 바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다. 2007년 5월 PD수첩은 이미 <‘신천지’의 수상한 비밀>이란 주제로 신도들의 피해사례에 대해 심층보도를 했으나 일반인들은 신천지를 신흥종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한동안 장막에 가려져 있던 신천지가 전격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퍼트린 핵심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신천지의 입회 과정과 선교방식은 치밀하고 기만적이다. 일반 교회에 ‘추수꾼’을 잠입시켜 교인을 꾀어가거나 아예 교회를 통째로 접수하기도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광경은 마치 전제군주제에서나 볼 수 있는 예배 모습이다. 신자들은 흰색 상의와 검은 바지를 똑같이 차려입고 군대조직보다도 더 정교하고 흐트러짐 없이 열을 맞춘 채 바닥에 꿇어앉아 설교를 듣거나 기도를 한다. 기성종교는 젊은 신도가 없거나 줄고 있는 추세인데 신천지의 경우 30퍼센트 이상이 이삼십대 청년들이라는 사실도 사뭇 의외다. 부모세대와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들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꺾었을까? 그 주된 이유는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 결핍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은 죽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다. 그는 신(神)으로 대변되는 절대적‧초월적 가치는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실존적‧독자적 주체로서 초인(超人)을 주창하였다. 인간은 이미 썩고 부패하여 그 형체가 문드러진 신에게 더 이상 의지하거나 종속될 필요가 없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신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노예가 아니다. 초인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 자기 삶의 주인이자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신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리는 혁명적 선언이다. 이로써 주체적 개인이 재탄생했다. 우리가 흔히 근대 이전과 이후의 유럽 철학 사조를 규정하는 모더니티(근대성)를 말할 때 개인의 주체성을 그 지표로 내세우는 이유이다.
니체의 이 말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면 현실은 어떤가? 도덕과 윤리, 규범과 제도, 선과 악, 종교와 사상 등 수많은 절대적‧초월적 가치가 개인의 주체성을 속박하고 옭아매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가치를 믿고 따르는 노예로 살지 않고 자기 삶의 주체이자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집요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신이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신은 있는가?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절대적 가치인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삶의 주체인 ‘개인=나’로 재탄생할 수 있다.
‘개인’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individual은 in+dividual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어는 divine(나누다)에서 기원하고 있는데, dividual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은 형태다. 따라서 individual을 직역하면, 둘 이상으로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즉 불가분(不可分)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날 ‘개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메이지유신 시절, 영어의 ‘individual’을 ‘개인’으로 번역하면서 일본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즉 개인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개인이란 다분히 유럽에서 형성된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신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전제군주인 신을 해체하고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개인’이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한국은 이런 주체선언을 한 경험이 없다. 군국주의를 해체하지 못한 일본은 아직도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천황을 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이라고 하여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한제국이 해체된 지 백 년도 더 지났지만 우리의 의식에는 조선의 절대군주를 온전히 죽이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해방 이후에도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퇴행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이승만을 국부로 소환하고, 박정희를 신격화시키려는 작업은 또 어떠한가? 근대 이후의 한국현대사회에는 아직도 전근대성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으로서 나와 우리는 충분히 주체적인가?” 하지만 나와 우리는 여전히 주체적이지 못하고, 내면에 진짜와 가짜라는 두 가지 얼굴을 함께 가지고 있다. 권력에 초연한척하면서도 내면은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척하면서도 실제는 자본 지향적이다. 내 삶의 주인이자 주체로서 철저히 개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살기보다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나를 희생한다.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행히 사회와 국가가 바라는 ‘공익적’ 목적과 부합한다면, 그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희생으로 개인은 권력과 자본은 물론 가문의 영광까지 한 손에 거머쥐는 영예를 누릴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의 이러한 노력이 대부분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맹목적으로 믿고 추구하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로 인해 결국 자신의 한 몸과 함께 가문과 사회, 국가마저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만다. 아버지=신은 자신과 닮은 아들=개인을 창조하여(둘은 서로 분리하여 나눠지지 않는다!) 그를 대리하여 지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해피엔딩을 바랐다. 아버지=신과 아들=개인이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후자는 전자를 부정하고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아버지 품을 벗어난 아들은 주체적이고 독립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아들=개인은 아버지=신을 버리고 죽이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새드엔딩이라는 비극적 혹은 파국적 상황으로 몰고가버리곤 한다. 시인 이성복이 <그해 가을>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는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는 상황은 현실에서는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신천지는 교주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가 있다고 하여 이만희를 총회장으로 부르고 있다. 그 의미는 이긴 자, 사도요한 격 목자, 대언자, 보혜사 성령, 재림 때의 예수라고 한다. 한마디로 신천지 신자들에게 이만희는 불생불사의 존재로 영생하는 아버지=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게 믿고 믿지 않고는 그들의 신앙의 영역이므로 가타부타 판단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 점은 분명히 일러두고 싶다. 이만희는 신도들에게 자신을 절대적‧초월적 존재로 신격화시키고 개인의 불안한 내면의 약점을 파고들어 개인을 철저하게 종속화‧노예화시키고 있다. 그는 신천지란 폐쇄집단을 통제하고 군림하는 독재자다.
자유와 권리를 위한 인간의 투쟁은 결국 자신의 삶에서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개인의 주체성 확보를 위한 처절한 싸움이다. 우리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도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 종교는 개인이 가지는 절대자유를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서서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 신천지가 가장 신랄하고 준엄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신천지 신도들은 자신을 노예로 만든 ‘아버지 씹새끼-이만희’를 극복하고 해체시켜야 한다. 종교와 신앙을 떠나 이 작업은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개인이 가지는 권리이자 의무이다.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1871년 파리코뮌전사들이 외치던 구호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굴종의 삶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다. 개인의 절대자유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념이기 때문이다. 신천지 신자든 아니든 우리는 자유롭게 살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개인으로서 가지는 그 권리를 침해하고 제한한다면, 그 누구라도 과감히 목 베야 한다. 그것이 신과 국가 혹은 이념과 사상이든 심지어 나 자신이라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