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형님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물론 창의적 강좌를 기획하는 시도들도 많다. 아래 글의 지적에서 제외될 훌륭한 강사들도 많다. 그런 경우는 당연히 이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지역에서 단체들 주최로 강좌가 열린다. 서울의 나름 유명한 진보인사들이 반복적으로 초청된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청중이 참석한다. 진보사회 사람들의 앎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가?
강좌를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2시간 정도 듣고 약간의 질의응답과 토론을 하는 학습 형식’이라고 정의해보자. 그러면 운동사회에서 단체가 주최하는 공부행사는 대체로 초청강좌인 것을 알 수 있다. 학습 형식으로서의 강좌는 청중의 자기소외다. 그 형식에서는 강사와 청중 사이에 지배와 소외가 생산·재생산된다. 소외된 주체는 스스로 힘으로 학습할 의욕을 잃게 되고, 결국 강의시간 내내, 학습내용 보다는 강좌학습이라는 지배 틀에 길들여진다.
오래 앉아 버티기! 강사와 하나 되기! 미디어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화면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 화면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배의 틀을 의미한다. 문제는 자본주의 지배 틀에 불러 앉혀진다는 것이다. 원래 진보의 학습은 세미나였다. 각자가 읽어오고 발제하며 토론하는 방식이다. 주체와 주체가 서로 부대끼며 상호를 주체화하는 과정으로서의 학습이다. 필자 나이 세대의 필독서인, 파울로 프레이리의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페다고지)은 바로 그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내용과 함께 형식이 주는 해방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현재 유행하는 진보운동의 강좌는 주체를 소외시키는 지배 틀에 불과하다.
사실 강좌는 유명 강사 브랜드 만들기를 통해 초청단체의 조직 강화로 귀결될 뿐, 정작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그 강의에서 소외된다. 이는 진보단체의 활동가들이 조성한다. 그들은 회원의 조직화와 조직 홍보를 위해 강좌를 활용한다. 상당한 효과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양상이 지속되면 이들의 순수한 의도와는 별개로,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수동화 하고 ‘지지자’ 위치에 묶어두게 된다. 그 수동성은 마치 연예인을 지지하는 청소년들처럼, 유명 진보인사의 트위터에 팔로워가 되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유명한 강사의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자신이 유명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화는 사회 전체의 문화산업화와 맞물려 진보를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킬 뿐이다.
브랜드화할 인물의 선정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회일반, 사실상 보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진보인사들이 선정된다. 보수와 대립적인 ‘내용’을 갖추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보수와 상당히 닮아서 보수가 용인할 수 있다. 실제 보수의 문화적 검증 틀을 통과한 일부 진보 출신 인사가 브랜드화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서울 거주와 유명대학 출신이라는 점에 흠칫 놀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이미 많은 기회가 주어져 있다. 지역 강좌에서 지역인사는 배척된다. 브랜드화하기에는 스펙이 딸릴 것이다. 반복해서 기회를 주면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불편한 길은 가지 않는다. 마트에서, 어제 본 TV광고대로 물건을 고르듯, 사던 제품을 또 산다. 장동건과 아이유가 사는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그래서 초청강좌는 지역을 수동화하여 서울에 종속시키는 데에도 이바지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상품소비자로 산다.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소비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소비자로 교육되고 마침내는 아예 프로그래밍 된다. 우리가 학교와 생산현장에서 예비노동자·노동자의 위치에서 지배받아 훈련되는 훨씬 이상으로 노동의 재생산 공간(일상생활의 공간)에서 소비자로 길들여지면서 마침내 피지배자로서 제대로 서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자본가의 기획이다. 강좌학습은 바로 이 방식을 빌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본의 주입식 교육을, 이제 자본가가 이어받아 활용하고 있는 한국자본주의의 지배방식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유명강사는 명품 가방이다.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강사가 주는 지명도를 소비한다. 그 과정에서 계층상승의 욕구를 충족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대한민국의 진보학자들에게 그 정도는 기본 상식 수준이지만, 그가 오직 하버드대학교 교수라는 브랜드로 인해 ‘떴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유명인과 자기 동일시하는 신분상승의 욕구가 함유된 ‘교환가치’이다. 오늘 유명한 누구의 강의를 들었고 내용은 기억날 듯 말 듯하지만 뒤풀이에서 소비자로서의 기쁨과 강사와의 자기 동일시에 만족해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얘기하듯 우리는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기호를 소비한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소비조작사회라고 규정했다. 르페브르의 제자 보드리야르는 미국이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장면이 CNN에 의해 생중계되자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시물라시옹, 즉 가상현실’이라고 했다. 청취자에게는 마치 전자오락과 영화의 한 장면과 동일시되며 폭격의 잔인성과 수많은 사람의 고통은 은폐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회를 헤치고 나가려면 스스로 주체화하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자신을 진보라고 외쳐도 이미 자본가의 기호를 우리의 기호로 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활동가나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기 학습이 아니라 강좌와 같은 형식의 학습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진보를 ‘이미지’로 인식하게 되면서 진보 이론의 자기 숙고성, 체계성을 상실한다. 즉 진보사상이 자본주의의 상품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이는 진영을 형성하기에는 유용하다. 하지만 항상 변화하는 사태를 원리적 사고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또다시 유명 강사를 초빙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유명강사는 보수 틀에 걸러진다. 그렇지만 지지자들은 본능적 관찰력으로, 이미 강사의 일부 얘기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체계적 사고에 의한 비판에 실패하면서,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이 좋아’에 주저앉게 된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교육자에 의해 교육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로지 ‘혁명적 실천’에 의해서만 교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는 대상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지 계몽적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계몽주의, 즉 못 배운 자를 눈 뜨게 하는 윤리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적 실천의 윤리학을 정립한다. 이는 많이 배운 자가 적게 배운 자를 가르치고, 전위가 대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실천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가르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강연과 강의는 특별한 목적, 예를 들면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때(강연)나 혹은 공부를 위한 기본 방향을 제시받기 위한 경우(강의)에 ‘최소로’ ‘일시적’으로 한정해야 한다. 공부는 함께 실천하며 토론하는 것이며 함께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는 학습방식이 혁명적 방식에 부합한다.
알튀세르는 ‘인간 주체성’을 이데올로기국가에 호명(부름을 받는다)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는 국가의 지식기능이 교육해 만든 주체일 뿐, 진정한 스스로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관찰은 이미 이전의 진보이론가, 특히 마르크스의 물신성·루카치의 사물화·아도르노의 관리되는 사회라는 개념에서 충분히 분석되고 경고를 받은 현상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호명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공부하고 사색하고 억눌린 자들끼리 함께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알튀세르는 이러한 비극적 자본주의 상황을 극복할 주체를 호명된 존재로 낮추어버림으로써 그 극복의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깨닫게도 해주지만 그 극복 주체를 해체하는 패배주의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전략은 노동해방=인간해방이다. 먼저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다음에는, 연속적으로, 그 노동에서조차 해방되는 것이다. 전자의 과정은 잉여가치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후자의 과정은 ‘자기목적으로서 인정된 인간의 힘’(자본론 3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삶이다. 하지만 강좌형식은, 자본이 노동을 소외시키는 지배방식이 학습형식에 옮아 붙어 자기목적으로서의 인간 형성을 좌초시킨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이에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이분되는 부르주아 강단의 방식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진보적 내용을 자본주의적으로 소비하면서 자본주의에 깊이 빠져들고 훈련된다. 도대체 오늘 우리 운동사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예를 들어 먼 위치에서 보거나 혹은 먼 미래에서 보면, 현재의 우리 운동사회의 정체성은 반자본주의라기보다는 친 자본주의에 ‘훨씬’ 가깝다. 그러니 더욱, 우리는 매일매일, 일상에서 사생결단하듯 자본주의의 의식과 문화와 대결함으로써 이 비극의 역사적 공간을 헤쳐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