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18세기 프랑스 여성들의 시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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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셋은 여성 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18세기 여성들은 단단한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을 비롯해 10가지가 넘는 속옷을 입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긴 드레스를 입었다. 무겁고 꽉 끼는 의복은 여성의 행동을 길들였다. 배와 등을 판판하게 만드는 코르셋을 입으면 몸을 굽힐 수 없다. 신발 끈도 혼자 묶을 수 없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주울 수 없다. 책을 읽으려면 손으로 세워 들어야 했다고 한다. 옷을 입고 벗는 것도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던 18세기 여성은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타오르는 초상’ 스틸 이미지

셀린 시아마 감독이 연출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프랑스가 배경이다. 부르타뉴 지역의 외딴 섬에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도착한다. 마리안느는 원치 않은 결혼을 앞둔 귀족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어머니로부터 딸의 정혼자에게 보낼 초상화를 몰래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결혼을 거부한 언니의 죽음으로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엘로이즈는 해본 것보다 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

모델로 서는 것을 거부하는 엘로이즈를 속이기 위해 산책 친구로 가장한 마리안느는 곁눈질로 엘로이즈를 이루는 무수한 선을 관찰한다. 화가로서 피사체를 훑어보던 마리안느의 시선은 엘로이즈의 내면까지 파고들면서 그의 감정이 묘하게 바뀐다. 결혼을 종용하는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엘로이즈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의뢰의 마지막 날 마리안느의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감정이 없다”고 지적한다. 마리안느는 다시 초상화 작업에 들어가고 엘로이즈는 모델로 선다. 둘은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뭍으로 나가 집을 비운 닷새 만에 초상화를 완성해야 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영화 초반부 마리안느가 화가의 신분을 숨기고 몰래 엘로이즈의 표정과 동작을 살피던 때는 카메라 앵글이 일방적이다. 그러나 신분을 드러내고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엘로이즈는 자신을 그리는 마리안느를 살핀다. 시선이 서로 오가면서 둘은 사랑을 확인한다. 영화는 시선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설레고 머뭇거리고 절망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의 과정과 쓸데없이 긴 격정의 러브신을 배제했는데도, 노에미 멜랑과 아델 에넬의 연기도 발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흐느끼는 아델 에넬의 모습은 깊고 그윽하다.

호러 영화에 나올 법한 음악을 활용한 점도 주연 둘의 감정 변화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든다. 특히 바이올린 현이 찢어지는 소리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마음이 충돌할 때 두드러져 효과를 상승시킨다.

영화는 비유와 은유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나타낸다. 18세기는 여성 예술가들의 권리가 조금씩 신장되던 시기로 구분된다. 하지만 여성 화가는 전시에 출품할 수 없었다. 1847년 출간된 영국의 고전소설 <제인 에어>는 작가 샬롯 브론테가 커러 벨이라는 남성 필명으로 원고를 제출했다. 샤를로트 뒤발 도녜(1786~1868), 콩스탕스 샤르팡티에(1767~1849), 마리드니즈 빌레르(1774~1821) 등 여성 화가들은 남성들의 노골적인 비판을 들어야 했다.

영화에 남성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남성 권력은 작용한다. 초상화 자체가 엘로이즈 남편을 위한 것이고, 엘로이즈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해 남성 권력에 반발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상징이다. 엘로이즈 어머니가 집을 비우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하녀 소피는 평등한 관계가 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처럼 지속될 수 없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소피가 성을 나와 마을 여자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때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옮겨 붙은 불이 이내 꺼지는 것처럼.

또 남성에게 벗어난 여성들이 합창하는 라틴어 가사의 노래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사의 뜻은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019년 제72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