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수 겸 배우 주디 갈란드(Judy Garland, 1922~1969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주디(Judy)>가 2월 개봉한다. 영화는 주디 갈란드 생애 마지막 시기를 그린다고 한다. 작중 주디 갈란드를 연기한 배우 르네 젤위거는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는 화려한 필모그래피 뒤에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주디 갈란드의 생애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하게 한다. 공개된 예고편에서는 발랄하고 경쾌한 장면들로 꾸며졌다.
주디 갈란드는 할리우드의 명작으로 꼽히는 <오즈의 마법사(1939년)>에서 도로시를 연기했다. 영화는 마법의 땅에 불시착해 집으로 돌아가려는 도로시의 여정을 그렸다. 용기와 친구의 중요성,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되새기게 만든다. <오즈의 마법사>는 영원한 동화로 남았다. 그가 부른 주제가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는 미국레코딩산업협회에서 ‘20세기 최고의 노래’로, 미국영화연구소는 ‘20세기 최고의 영화음악’으로 선정했다.
배우 주디 갈란드의 명성은 드높지만, 개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은 주디 갈란드를 가리켜 ‘할리우드를 위해 태어나, 할리우드에 의해 죽은 배우’라고 말한다. 그에게 명성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준 것이 할리우드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인물 사전 등에 따르면 주디 갈란드는 배우 아버지와 배우지망생 어머니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3살부터 두 언니와 함께 무대에 섰다.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 덕분이었다.
13살이던 1935년 전성기 할리우드 대표 영화사 MGM 오디션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했다. 틴에이지 로맨틱 영화에서 아역으로 등장하던 그는 17살에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81년이 지난 지금도 명작으로 꼽힌다. 후대에 주디 갈란드의 이름은 남았지만, 정작 자신을 불멸의 아이콘으로 만든 영화는 그의 삶을 나락으로 추락시켰다.
주디 갈란드는 딸을 성공시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했다. 비중 있는 역할을 따내기 위해 주디 갈란드에게 영화사 관계자들의 성접대를 시켰다. 자신이 못 이룬 배우의 꿈을 딸을 통해 완성하기 위해 성접대를 주선한 것이다. 또 영화사는 촬영장에서 하루 수프 한 접시와 블랙커피 한 잔만 주디 갈란드에게 먹이고 담배 4갑을 피우라고 강요했다. 빡빡한 촬영 일정을 소화하고, 살을 빼야 한다는 이유였다.
영화사와 가족은 주디 갈란드가 이런 고문을 견디게 하기 위해 각성제인 메스암페타인을 먹이고, 촬영이 끝나면 일찍 재우기 위해 수면제를 먹였다. 암페타민은 피로와 식욕을 낮춰주지만, 뇌 손상, 호흡곤란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주디 갈란드는 약에 취한 채 카메라 앞에서 연기했다. 주디 갈란드를 아껴주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그를 돌봐줄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어린 주디 갈란드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할리우드의 현실이었다.
주디 갈란드는 영화사 관계자들과 가족에게 어린 나이에 온갖 욕설과 성희롱·추행, 폭행도 견뎌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주연을 맡은데 대해 앙심을 품은 배우들은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주디 갈란드에게 친절하게 대한 건 배우 마거릿 해밀턴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로시가 물리치는 서쪽의 마녀 역할이었다.
외모콤플렉스도 주디 갈란드를 괴롭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라나 터너, 에바 가드너 등 당대의 배우들과 비교당하며 생긴 열등감 때문이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팜므 파탈이나 핀업걸이 인기인 탓에 키 151㎝에 귀여운 외모의 주디 갈란드가 맡을 배역에는 제한이 컸다. 외모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주디 갈란드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성에게 사랑을 갈구했다고 한다. 행복하지 못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누군가를 갈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디 갈란드는 배우로서의 삶은 화려했지만, 개인의 삶은 만신창이였다. <오즈의 마법사>에 출연한 이후로도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 <스타탄생> 등 배우로서 화려한 행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20대에 이미 알코올 중독과 약물중독까지 겹친 상태였다. 네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하고, 신경쇠약으로 수차례 입원하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
첫 번째 남편은 다른 배우와 바람이 났고, 유뷰남이던 두 번째 남편은 약속을 저버리고 주디 갈란드의 곁을 떠났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는 소녀 이미지를 의식한 가족과 영화사의 강요에 의해 지웠다. 주디 갈란드는 낙태로 죄의식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 번째 남편은 도박에 빠져 이혼하고, 네 번째 남편은 주디 갈란드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동성애자였다. 마지막 남편인 미키 딘스와 1969년 결혼하지만 같은 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80여 년 전 헐리우드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한국 연예계에서도 스타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진다. 자의든 타의든 어린 나이에 연예계의 냉정한 생리 구조 안에 갇혀 혹독한 경쟁을 치른다. 인격체로 자라기도 전에 대중이 원하는 스타로 키워졌고, 인생을 알기도 전에 무대 위에서 살아야 한다. 입신양명한 이후로는 뒤틀린 삶에 대한 공감은 물론, 일말의 존중조차 받을 수 없다.
검색어의 칼날 위에 세워져 마녀사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홍역을 치르기도 한다. 카메라와 마이크, 온갖 루머가 도는 온라인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마약, 성추문 등 연예계 온갖 문제는 스타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상징한다. 모든 이를 즐겁게 해도 스스로는 결코 즐겁지 못하는 스타의 인생이 아이러니하다. 연예인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수십 년이 지나도 무지개 저편 어둠은 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