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대국, 중화권의 노동과 민주주의 탐방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폭발하자 국내 여론 다수는 홍콩 시위대를 찬양하고 중국 공산당과 대륙 정부를 규탄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서구 민주주의를 일정 부분 체험한 홍콩의 시민은 중국 정부의 조종을 받는 홍콩 행정부와 경찰에 용감히 맞서 지금도 저항 중이다. 하지만 중국 대륙 그리고 대만과도 다른 영국령 홍콩의 근현대사에 대한 고찰과 분석은 드물다. 또한, 반대급부로 홍콩의 민주화 투쟁을 찬양하면서 중국 본토에서는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 것처럼 매도하며 ‘혐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경우도 곧잘 눈에 뜨인다.
그러나 홍콩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지언정 중국 대륙 내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당하는 다양한 노동자 운동은 분명히 실체가 존재한다. 정치적 민주화에는 지난 1989년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 이후로 철저하게 공안(경찰) 탄압으로 일관하는 중국 대륙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인지한다면, 그런 엄혹한 조건 하에서도 대륙 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노동자운동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내 노동자 운동을 다룬 영화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드물다. 아니 정식으로 들어오는 경우 자체가 희귀할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이번 상영회에서 선보이게 될 <흉년지반 We the Workers>는 174분에 걸쳐 중국 본토에서 탄압에 맞서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활동가들의 활약과 수난은 물론,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의 수억 노동자들이 처한 노동 현실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로 스스로를 주장하는 중국 공산당 정권하에서 노동 소외의 민낯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 남한 사회를 지배한 개발독재와 너무나 닮은 불평등과 억압은 아무리 통제하더라도 불만과 저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중국이라는 대륙 그 자체라 할 규모 아래 지역별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소규모 노동자 운동은 중국 정부의 편집적인 경계와 집요한 탄압에 쉽게 진압당하고 있다. 공산당 정권이 분배에 힘쓰고 노동자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생성되는 노동자 운동을 불식시킬 수 없음을 본 작은 증명한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에 각자의 이유로 참여했던 청년 세대 5명의 후일담을 통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올해의 사건”, 2019년 송환법 반대 투쟁에서 촉발된 홍콩 민주화 운동의 생성 기원과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장편 다큐멘터리 1편이 추가로 소개될 예정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 본토의 세계 경제 편입과정에서 홍콩 부의 총량은 늘어났다. 하지만 본토 노동력이 유입되고 물가나 주거조건이 열악해지면서 현재 남한의 풍경과 흡사하다. 청년실업은 물론 정치적으로 점차 중국대륙에 끌려가게 되는 사회현실에 대한 홍콩 청년 세대의 분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비정규교수, 구미 KEC 소수가 된 민주노조
한국현대사의 모순을 압축한 가족사의 풍경들
<늙은 투쟁, 가家 이야기>는 2010년 이후 4차례나 유예된 끝에 2019년 8월부터 시행 중인 속칭 ‘시간강사법’,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다룬 첫 번째 장편 다큐 영화이다.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선을 보인 후 2020년 개봉을 목표로 후반부 작업을 새로 진행 중인 신작을 지역에서 처음으로 소개한다. 가능하면 영화에서 다루는 대학교 시간강사와 비정규교수 당사자들에게 피드백을 받아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9년간 사회적 논쟁 끝에 결국 올해 하반기부터 개정 강사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혼란은 여전하다. 개정법에 의하면 비정규교수들은 1970년대 후반 이후 40여 년 만에 고등교육법상 교원지위를 회복하고 최소 1년 이상의 계약과 방학 중 임금 지급 등 ‘진일보’한 권리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법 개정 전에 비해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고 계약해지만으로 ‘해고’하던 관행을 포기하기 싫은 대학 당국에 의해 ‘대량해고’ 공포와 고용불안에 오히려 내몰리고 있다. 제조업 노동자들에 비해 조직화된 활동에 소극적인 ‘지식노동자’ 비정규교수들이 어렵게 조직을 만들어 투쟁을 벌여왔지만 내부에서 투쟁방식의 이견은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패이면서 보다 크게 단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제목 그대로 ‘늙은 투쟁, 가 이야기’로 담아낸다.
경북 구미에 위치한 KEC 공장에는, 2010년 파업 후 회사의 지속되는 민주노조 탄압의 결과로 복수노조가 들어서 있다. 민주노총 KEC지회는 현재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잃고 제2노조로 활동 중이다. 2노조이지만 1노조인 사용자 친화적인 다수 노조와 협의는 원만하지 않다. 회사와 1노조의 노골적인 배제 하에서 교섭권과 동떨어진 ‘민주노조’의 투쟁방식과 노조 활동가들의 고민은 물론, 2019년 현재 노동조합 안팎의 풍경과 일상을 제대로 다뤄낸 작품이 2019년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깃발, 창공, 파티>이다.
159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작품은 KEC지회의 입장에 기울어 있음을 영화 첫 장면부터 명확히 한다. 하지만 이를 강변하기보다 내레이션을 배제하고 그저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일상을 묵묵히 관찰해낸 장면을 관객에게 전달해 직접 판단하도록 이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결 과정을 스릴 있게 보여주고 설명과 해설을 통해 전달받기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물론 독립영화에서 노동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현재도 자주 다뤄지는 소재이다. 하지만 흔히 상상하는 화끈한 투쟁과 대결 현장이 아닌, 21세기 들어 노동조합 일상 활동을 “깃발, 창공, 파티”처럼 집요하게 담아내는 카메라는 드물다. 단편이나 홍보영상이 아니라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극적인 순간을 보여줘야 관심과 주목을 받게 마련인 영화 작업에서 장윤미 감독의 이런 시도는 지극히 희귀한 사례이다. 심지어 KEC지회 활동가들조차 좀 더 작품이 짧고 대중적으로 만들어지길 기대했을 테다.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상호 신뢰가 여간 튼튼하고, 작품의 방향에 대한 감독의 작가로서의 판단이 흔들림 없었기에 가능했을 작업이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가장 종합적, 총체적으로 복수노조 시대 민주노조의 고민을 일상으로 풀어낸 기록일 것이다.
21세기 이후 ‘독립다큐’에서는 과거의 조직운동이 담지하던 큰 이야기와 작가 개인 혹은 가족이나 주변 환경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한데 모아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중이다. 특히나 한국근현대사의 픽션보다 더 극적이고 기막혔던 과정은 개인의 삶이 거대사에 질식되도록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옵티그래프>는 그런 역사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이끄는 매력이 넘친다. 이 작품은 실험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관객은 그 구조에 낯선 진입장벽이 존재하지만, 꾸준히 실험 영화를 만들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이원우 감독의 세계에 제대로 안착한다면, 감독의 다양한 사회적 체험과 외할아버지의 생애를 쫓는 여정이 함께 어우러지며 성찰을 제공하는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감독을 무척 아끼던 외할아버지 작고 후, 손녀에겐 다정하게만 기억되던 할아버지의 놀라운 과거가 드러나고, 그 삶의 편린은 자랑스러움과 곤혹감을 함께 던진다.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경로가 외할아버지 삶의 행적 속에서 전개되고, 다양한 사회적 참여에 힘써온 감독 자신의 경험들이 종횡으로 진행된다. 시나리오가 아니라 이미지의 교차와 중첩으로 펼쳐지는 방식은 문학이 아니라 추상주의 회화처럼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 속에서 역사와 가족에 대한 성찰, 국가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감독에게서 관객을 향해 전이되는 독특한 체험을 선사하는 실험영화 “옵티그래프”이다.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영화들, 그 이해를 돕는 부대행사
12/21(토) 첫 상영작인 <흉년지반> 상영 후 3시간에 달하는 생소한 현재 중국 본토의 노동자운동 현황을 설명하기 위해, 본 작품의 한국어 번역자이기도 한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가 전문가 해설을 준비하고 있다. 두 번째 상영작인 <늙은 투쟁, 가 이야기>는 본인도 다년간 대학교 시간강사 생활을 체험한 신임호 감독이 영화에 담지 못한 이야기와 제작 당시 상황을 나눌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할 예정이다.
12/22(일) 첫 상영작인 2014년 홍콩 우산혁명 다큐 상영 후에는 상영회 전체 기획을 담당했고, 현대 중국에 대한 기고를 여러 차례 작성한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가 간단한 시네토크를 진행한다. 다음 상영작인 <깃발, 창공, 파티>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21세기형 노동 다큐를 완성한 장윤미 감독이 설명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영화의 뒷배경을 해설하기 위한 감독과의 대화를 준비 중이다. <옵티그래프>의 이원우 감독은 현재 해외 체류 중이라 초청하지 못했다.
연말 분위기 속에서 다소 무거운 소재와 배경, 전형적이지 않은 표현기법과 구성의 작품들이지만, 영화가 극장 문을 나서면 휘발되는 것이 아닌, 나오는 순간부터 사유와 성찰로 연결되는 데에는 매우 적절한 라인업이라 자부해본다. 영화들이 담고 있는 내용에 관심 있는 지역 관객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영화제는 21일부터 22일까지 대구 중구 소재 카페필름통에서 진행된다.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조직위와 대구영상미디어센터가 주최하고 영화진흥위가 후원한다. 행사는 김상목 프로그래머(010-8598-1324)에게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