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정희] (2) 영천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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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다

3.1운동 이후 기독교계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여성단체를 만들고 계몽운동에 나선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그래야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김마리아, 황에스더 등 익숙한 여성독립운동가도 기독교계 인물이다.

▲1927.10.22 근우회 강연회_매일신보 每日申報

영천을 떠난 김정희도 그랬다. 교회 당회록에서만 보이던 그의 이름은 1927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근우회 토론회에서 등장한다. 근우회는 1927년 5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 운동가들이 모여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토론 주제는 ‘조선 여자의 해방의 첩경이 경제독립이냐? 지식향상이냐?’. 김정희는 8명 패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경제 독립을 주장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낯선 서울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편 김정희 씨가 등단하야 해방의 딱바른 길로 갈라고 하면 경제적 해방을 바다야 되겠다고 경상도 사투리로 청중을 웃기고…”1

근우회 결성 몇 달 전인 1927년 1월 일본 동경에서는 ‘재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이 창립한다. 이때 김정희는 조사부에 이름을 올렸다. 이 단체는 1928년 1월 근우회 동경지회가 생긴 후 해체한다. 김정희는 근우회 동경지회 핵심 멤버였다. 동경지회 발기인이었고, 창립 직후에는 선전조직부를 맡았다. 신간회 동경지회에서도 활동했다. 김정희는 대구에 몇 해 머무르지 않고 동경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조선여자해방에는 경제독립이냐 지식향상이냐’, 1927.10.22.

3월 18일부터 근우회 동경지회 선전주간 행사가 열렸다. 마지막 날인 23일 열린 여성문제 강연회에는 2천여 명이 모여 들었다. 신간회 동경지회는 물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동경조선노동조합 등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인단체도 참석해 지지를 보냈다. 언론에서 “동경의 여성단체로서는 보지 못한 대성황의 강연회였다”고 할 정도였다.2 김정희는 이날 ‘열렬한 부르짖음’으로 강연을 마쳤다. 그는 더 이상 ‘최복암의 부인’이 아닌 ‘여류투사 김정희’였다.

‘봉건유습을 타도하자! 노예적 교육정책에 반대하자! 녀성에 대한 일제 차별 대우에 항쟁하자! 전조선피압박녀성은 단결하자!’ – 동경지회 선전주간 슬로건

‘근우회 vs 근우회 동경지회’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는 창립부터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갈등이 계속됐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 즈음인 1928년 2월에는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는다. 이때 김정희는 신간회 동경지회 대의원에 당선됐다. 경찰은 김정희를 포함한 ‘민족계 사람들’이 단체를 좌우하게 됐다면서도 ‘일본 사상운동 현황으로 보아 조만간 공산계 좌익분자에 의해 조정될 것’이라고 봤다3.

김정희와 함께 근우회 동경지회 초기 멤버인 김순실, 양봉순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원이었다. 동경지회가 창립하면서 해체한 재동경여자청년동맹은 공산주의계 여성운동 조직으로 분류된다.4 경찰은 김정희를 민족주의 계열로 분류했지만, 그가 활동했던 단체는 사회주의 계열에 더 가까워 보인다.

1928년 경찰은 신간회 전국대회에 이어 근우회 전국대회도 금지했다. 근우회는 5월 26~27일 서울에서 전국대회를 열 예정이었다. 경찰은 전국대회 의안과 참가자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대회를 금지했다. 동경지회는 곧장 반발했다. 전국대회 금지 사건은 근우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경지회는 단순히 경찰의 결정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의도적 계획을 갖고 대회를 금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소시민이 단결해서 전국적인 항거를 일으켜야 한다고 제안한다.5

▲근우회 동경지회, _근우회 전국대회 금지 폭거에 대하야 전조선피억압 민중에게 격함_, 1928.5.20. 독립기년괌 제3전시관 소장.

전조선노동자(全朝鮮勞動者), 농민(農民), 학생(學生), 소시민(小市民)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抗議運動에 參加하십시요. 그리하여 저들의 非人間的 彈壓에 絶對反對 합시다. 이러함으로서만 여러분의 解放도 우리들의 解放도 같이 얻어질 것입니다.
一, 근우회전국대회금지(槿友會全國大會禁止)에 전민족적(全民族的) 항거운동(抗議運動)을 일으키자!
一, 신간회전국대회금지(新幹會全國大會禁止)에 전민족적(全民族的) 항거운동(抗議運動)을 일으키자!
一, 삼총해금운동(三總解禁運動)을 전국적(全國的)으로 일으키자!
一, 언론출판집회결사(言論出版集會結社)의 자유(自由)를 쟁취(獲得)하자!
一, 조선총독폭압정치(朝鮮總督暴壓政治)를 타도(打倒)하자!

하지만 근우회 본부는 의안 논의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7월에 임시 전국대회를 열기로 경찰과 합의한다. 근우회 본부와 동경지회 입장 차이는 뚜렷했다. 이번에는 신간회 동경지회와 공동성명을 내고 본부 결정을 비판했다. 동경지회는 계속해서 전면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우회 본부는 급기야 동경지회 간부들에게 무기정권 처분을 내렸다. 동경지회가 본부 결정을 무시했다는 이유다. 7월 14~15일 서울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회에 김정희와 동료들은 정권 상태로 참석해야 했다.

근우회 결성 후 첫 전국대회였지만 핫이슈는 동경지회 사건이었다. 대회장은 시작부터 소란스러웠다. 정권 상태인 동경지회 회원에게 대의원 자격을 주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쟁이 오갔다. 동경지회 성명서 사건 진상 보고 후에도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오후 8시 반에 시작한 대회는 12시 반이 되어서야 산회했다. 결국 동경지회는 사과하고 성명서 발표를 취소하는 조건으로 대의원 자격을 얻는다.

“동경지회 대표 양봉순 씨가 나와 성명서는 원칙적으로 시인하나 다만 xx간부의 관료적 교섭과 굴종적 행동 운운만 자세히 알지 못하고 발표한 것임으로 일반 대의원에게 사죄를 하는 동시에 일반 사회에 다시 취소의 성명서를 발표하겠노라고…” – <중외일보>, ‘정권된 동경지회, 의원 자격문제로 갑론을박 시비 속출’, 1928.7.16.

근우회와 함께 사라진 그녀의 기록

전국 임시대회를 거친 1928년 중반 이후 기독교계 여성들은 점차 근우회에서 탈퇴한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농촌계몽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흐름과 같다. 1928년 12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손을 놓기 시작한 것도 한몫한다.

근우회 동경지회는 1929년 신간회 동경지회와 함께 해소했다. 1929년 6월 동경지회 3회 정기총회가 열렸는데, 더 이상 김정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 동경지회 간부들 사이 파벌 싸움이 있었다.6

▲강윤정 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연구부장(현 안동대 사학과 교수)

강윤정 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부장은 “이 분이 보통의 부인으로 살았다면 동경 쪽에서 활동한 자료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자료를 찾을 때 동일인물이라고 상상도 못했다”며 “그런데 일본 문건에 나온 주소가 친정집 주소와 같은 걸 발견했다. 3.1운동 활동만으로 서훈 추진을 하던 것을 잠시 멈췄다”고 말했다.

그 이름은 1940년 발행된 사상휘보에 다시 등장한다. 사상휘보는 일제가 감시하는 요시찰인물을 기록한 문건이다. 김정희가 1939년 신의주에서 허가받지 않는 금가락지 두 개 가격인 135원을 만주로 유출했다고 한다. 직업은 무직이다. 이름과 나이가 같지만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정희는 교회 계몽운동에 합류하지 않고 해외 독립운동 군자금을 보태는 활동을 한 걸까. 영천, 동경에서 그의 행보를 보면 가능성 있다. 그는 기독교 독립운동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김정희의 꿈은 교회를 뛰어 넘었다. 1945년 8월, 그는 꿈이 이루지는 장면을 보았을까.

  1. <동아일보>, ‘조선여자해방에는 경제독립이냐? 지식향상이냐?’, 1927.10.22.
  2. <동아일보>, ‘근우동경지회 여성문제강연회 3월 13일에’, 1928.4.14.
  3. 류시중 외, 『국역 고등경찰요사』, 선인, 2009, p285.
  4. 김인덕, 「신간회 동경지회와 재일조선인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7』, 1997.
  5. 근우회 동경지회, ‘근우회 전국대회 금지 폭거에 대하야 전조선피억압 민중에게 격함’, 1928.5.20. 독립기년괌 제3전시관 소장.
  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 : 재일본한국인민족운동자료집』, 1979, 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