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정희] (1) 혈서로 쓴 독립만세

1919년 3월, 경북 영천
만세운동 좌절
대구로 떠난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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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경북 영천

서울, 평양, 대구 큰 도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가까운 대구에서는 남성정교회 목사가 잡혀갔다. 왜 영천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영천읍 과전동에 사는 최복암의 부인, 김정희(金正希, 1896~?)는 어느 날 밤 혼자서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깃발부터 만들었다. 하얀 명주 천에 작은 칼로 집게손가락을 베어 피를 냈다. 집게손가락으로 한글과 한자를 섞어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썼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읽은 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퍼졌다. 경상북도 역시 8일 대구를 시작으로 의성, 안동, 성주 등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3월 30일 대구에서 만세를 부르며 거리에 나온 사람은 3천여 명이다. 대구와 붙어 있는 영천은 3월 한 달이 지나도록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4월 6일이 돼서야 학생 몇몇이 나뭇가지에 태극기를 걸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 박필환(朴弼煥)이 학생들을 불러 놓고 만세운동 상황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같은 날 밤 학생 10여 명은 신녕면 일대에서 또 만세를 불렀다. 영천에서 일어난 첫 만세운동이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경찰에 바로 잡혔다. 신녕면에 사는 농부 북장로파 김준운(金俊運)1도 학생들 배후로 지목돼 붙잡혔다. 김준운은 8일 영천 신녕시장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김준운과 학생들이 잡혀간지 일주일이 지나자 영천읍 장날 다시 만세 소리가 들렸다. 영천읍 입석동에 사는 농부 홍종현(洪鐘顯)1이었다. 홍종현은 시장 앞 공립보통학교 입구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에는 천여 명의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만세 소리에 상인들이 호응했다. 하지만 홍종현은 시장을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바로 검거됐다. 깃발과 태극기 만드는 것을 도와준 2명도 같이 붙잡혔다. 만세운동은 또 좌절됐다.

1919년 4월 13일, 홍종현이 잡혀간 다음 날 오전 11시, 김정희는 전날 밤 혈서로 쓴 깃발을 챙겨 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조용했다. 그는 과전동에서 창구동으로 가는 도로를 오가며 깃발을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정희가 여러 사람에게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지만, ‘왜놈의 압력에 위축되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2

결혼한 여성이 무슨 배짱으로 혼자 집 밖에 나가 소리를 질렀을까. 경찰에 잡혀갈 것이 뻔한 ‘독립만세’를. 고등계 경찰보였던 김정희의 동생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검찰에 넘겼다.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회유했다. 오히려 김정희는 큰소리쳤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아마 정신이상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당시 김정희는 24세였다. 결국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사는 김정희가 출옥 후에도 활동을 하다가 고향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

“동생은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굴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정신병자로 몰아 검찰로 압송하였다. 그는 대구 검찰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 (…)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았으나 아무 두려움 없이 태연하게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에도 구국일념으로 활동하다가 고향을 떠난 후 소식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 『독립운동사 제3권 : 3·1운동사(하)』 중

김정희가 잡혀간 후, 영천에서 한 번 더 만세운동 시도가 있었다. 임고면에 사는 18살 김낙헌(金洛憲) 4은 4월 27일 창구동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전날 마을 서당 학생들과 약속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태극기를 감추어 시장으로 가던 김낙헌은 순찰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영천의 만세운동은 번번이 실패했다.

만세운동 좌절
대구로 떠난 김정희

김정희와 그의 남편은 성내교회(현 영천제일교회)에 다녔다. 출옥 후 김정희는 남편과 함께 영천을 떠나 대구로 갔다. 1921년 그는 교회 송영회에서 송영사로 백여 명의 교인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5대구 남성정교회로 교회를 옮기고, 그의 남편은 교회에서 집사, 권찰로 활동했다.

“교인 중 김정희 여사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전성(全城)이 침묵하던 중 만세를 독창하고 대구 감옥에서 8개월간 복역하였다.” – 『경북교회사(1894~1923)』 중

가까운 대구에서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의 이만집 목사, 김태련, 김영서 장로 등이 만세운동을 조직했고,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 기독교 학교 교사,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 북장로파 김준운이 영천 학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것도 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교회가 나서길 기다리다 지쳐 혼자 거리로 나섰던 걸까. 그는 영천의 교회가 만세운동에 나서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당시 수감기록이 있는 교인 1,440명의 교적을 찾기 위한 ‘1440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손산문 목사(영천 자천교회)는 “전체 교회사를 보면 교회에 3.1운동을 주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뒤따라 운동을 펼친다. 그런데 영천제일교회는 잠잠했다”며 “김정희 여사가 대구 여러 교회 중에 대구제일교회로 간 게 아마 이만집 목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성 혼자서 독립운동 의지를 발현하는 모습을 보면 그랬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대구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어머니 교회’로 불린다. 경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교인 수도 가장 많았다.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영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실망한 김정희가 대구에서 제대로 독립운동을 펼쳐보려고 했던 걸까.

  1. 1990년 ‘애족장’ 독립유공자 서훈
  2. 이용락, 3.1운동실록, 1767, 영남인쇄소, p.278.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 3·1운동사(하)』, 1979, p365.
  4. 1992년 ‘대통령 표창’ 독립유공자 서훈.
  5. <동아일보>, ‘야소교역자 송영회’, 192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