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배트맨과 조국 /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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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조커에서 조커는 전형적인 악당과 거리가 있다. 사실 그의 악행은 고담시의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가진 자들에 의한 멸시와 조롱이 만들어낸 것이다. 기묘한 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조커라는 악과 이후 조우하게 될, 악을 물리치는 배트맨과 만남에 있다. 브루스 웨인이 악과 싸우는 방식을 한번 보자. 배트맨에게는 다른 히어로와 달리 초능력은 없지만, 그에겐 아버지가 물려준 돈이 있다. 낮의 브루스 웨인은 자선행사를 열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부자다. 반면 밤의 배트맨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불평등이 낳은 모순인 조커와 맞서 싸우기 위한 장비들에 투자한다. 고담시 시민들 모두에게 둘은 우상이다. 그들로 인해 악당은 사라졌지만, 고아·더러운 뒷골목 등 고담시의 불평등은 여전하다.

자신들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는 자들을 동경하는 것은, 내가 ‘배트맨, 브루스 웨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투사다. 배트맨을 추종하며 그의 모습을 흉내 내 악을 처단하려는 수많은 일반 시민들. 브루스 웨인을 도와 웨인 그룹을 악당들의 손아귀에서 빼앗아내려는 자수성가한 부자 ‘미란다 테이트’. 그들의 모든 행동은 재력을 통해 악당을 해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왜 악당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질문은 없다. 기존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은 기묘한 공생관계이자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인 셈이다.

조커와 배트맨 영화를 보며 씁쓸했던 점은, 조커에서 보인 시민의 분노가 왜 배트맨에까지 이어지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조커에서 나타난 고담시의 모습과 배트맨에서 나타난 고담시의 모습은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확실한 건 사람들은 가난하고 열등감에 빠진 조커보다, 부유하고 악을 처단하는 영웅인 배트맨에 환호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 삶의 근저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문제제기하는 투쟁이 아닌, 욕망의 대상에 자신을 투사하는 손쉬운 방안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진=오마이뉴스]

그런 점에서 조국과 배트맨은 비슷하다. 사회 기득권이면서 내 행동의 도덕적 준거가 자신이 아닌 일반 시민을 위한다는 명분까지 말이다. 문제는 둘 다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있다. <88만 원 세대>가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문제제기를 한지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상위 1%가 전체 자산소득의 90%, 임금소득의 40%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 만연한 불평등 사회가 됐다. 문제는 이 불평등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불평등 담론은 능력 없는 자들의 떼쓰기로 치부됐다.

가장 뼈아픈 것은 개인보다 사회라는 가치를 우선시했던 진보 역시, 불평등에 눈감았다는 것이다. 국내 진보 세력은 민주화를 이끌어낸 공로가 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성장담론에 포섭됐다. IMF 이후 진보 정부에 의해 도입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산,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자산, 소득의 경제적 양극화는 사회, 문화적 양극화로 이어졌다. 부모의 소득에 따라 자녀의 학벌이 정해졌다. 결국 경제·사회·문화적 양극화는 부유층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이번 조국 사태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능력으로 포장된 것들이 기득권임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 그들은 주어진 능력이 아닌, 기득권을 이용한 지위를 세습하려 한 것이다. 즉, 시민들의 분노는 우리 모두가 욕망한 조국으로 대표되는 성공방정식을 우리가 따를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것이다. 허나 이는 거꾸로 보면, 조국이 되길 원한 일반 시민이 보인 욕망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배트맨은 결코 자신이 브루스 웨인임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이 묵인한 불평등한 구조가 빚어낸 ‘악당’을 처단하는 것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공생관계를 보여준다. 이 공생관계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사회에 나타난 모순은 그들이 용인한 불평등이 만든 것임을 시민들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회에서 시민들은 더 이상 배트맨을 모방하지도 조국이 되길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