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보편을 지배하기 : 판결문과 논평 /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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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평범, 정상은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이 개념들은 다른 세계를 적당히 배척하며 그 지위를 얻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삶, 평범한 인간, 정상적인 가정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삶, 평범하지 않은 인간, 비정상적인 가정이라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편성과 정상성은 때로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보편이 무엇인지 생각하기에 앞서 누가 이 개념을 지배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년이 어디나 있음을
당신은 안다.
그것은 한
남자일 수 있고
한 여자
한 어린이
또는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그것은
내게는 깜둥이로
들렸다.

니키 지오반니의 시 ‘보편성universality’이다. 보편적 존재에서 밀려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다. 보편적 인권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에게 보편은 어떤 의미인가. 소년이 흑인일 경우, 그는 깜둥이다. 노인이 흑인일 경우, 그는 깜둥이다. 변호사가 흑인일 경우, 그는 깜둥이다. 그렇게 ‘깜둥이’는 한 인간을 장악하는 정체성이 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장악당한 존재는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다. 보편적인 존재는 개별성을 얻는다. 반대로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는 개별성을 상실한다.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읽힌다. 여자, 흑인, 장애인 등.

‘보편적인 존재’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위치에 쉽게 오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여 공적 문서와 사적 문서를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종종 범한다. 최근 두 가지 사건에서 이와 같은 태도를 발견했다. 레깅스를 입은 여성을 몰래 촬영했으나 무죄가 나온 사건의 판결문과 민주당 청년대변인의 한 논평에서다.

▲의정부지방법원은 지난 10월 레깅스를 입은 여성을 몰래 촬영한 남성에게 1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했고, 판결문에 관련 사진을 첨부했다. (사진=의정부지방법원)

우선 불법촬영 건은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되는데다 ‘스키니진’과 별반 차이가 없음. 피해자의 진술이 불쾌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움” 등의 이유로 무죄가 되었다. 피해자의 불쾌감을 인정하지만 ‘성적 수치심’이라 볼 수 없다며 피해자의 감정을 정의한다. 또한 레깅스라는 옷이 ‘일상복’이며 노출 부위가 적다는 이유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고 한다. 여성주의 활동가 권김현영의 지적대로 “자신의 사적 취향이 공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적이다. 이 판결문이 더욱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불법촬영물을 갈무리한 해당 여성의 사진을 판결문 내에 포함해서이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에 대한 판단은 이 사건만이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강제로 여성의 손을 잡아 주물러도 ‘수치심 일으키는 부위’가 아니라며 무죄가 되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신체 부위를 물리적으로 구획을 나누어 판사의 시각에 따라 성적 대상과 비성적 대상으로 정의한다는 점에 있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만지거나 촬영하는 것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판사가 보기에 비성적 대상인 신체 부위이기에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한다.

판결문은 공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때로 권력있는 주관이 지배하는 문서다. 레깅스는 일상복이 맞다. 문제는 그 일상복이 어떤 시선 아래 놓이는지를 왜 모른 척 할까. 디시인사이드에서 나는 ‘레깅스충’이라는 표현을 보았고, 레깅스 입은 여성들 사진을 모아놓고 각종 희롱과 비하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레깅스 갤러리가 따로 있으며, 댓글 중에는 “오늘은 이거다!”도 있다. (단 몇 분만 투자하면 찾는다) 이런 현상을 외면하고 ‘일상복’, ‘수치심 유발하는 부위 아님’만 기계적으로 읊어댄다.

▲장종화 더불어민주당 청년대변인이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작성한 논평.

두번째로 민주당 청년대변인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논평에서 ‘보편적 존재’의 투정에 가까운 착각을 발견한다. 당의 공식입장이 아니라며 결국 이 논평은 철회되었으나 ‘당의 속마음’을 발견한 기분이다. 영화를 두고 공당의 대변인이 논평을 낸다는 게 우선 의아하다.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쓸 수 있는 다른 통로도 있을텐데 그는 왜 ‘논평’이라는 형식으로 대변인 신분으로 글을 썼을까. 논평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거꾸로 ‘82년생 장종화’를 영화로 만들어도 똑같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단순히 숙제 하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스윙 따귀를 맞고, 스물둘 청춘에 입대하여 갖은 고생 끝에 배치된 자대에서 아무 이유 없이 있는 욕 없는 욕은 다 듣고, 키 180 이하는 루저가 되는 것과 같이 여러 맥락을 알 수 없는 ‘남자다움’이 요구된 삶을 살았다”

지독하게 ‘나’ 중심의 서사과잉이다. 이러한 남성들의 서사는 이미 많이 나왔고 여전히 나오는 중이다. 영화와 문학에서 남성들의 성장 서사, 군대 이야기, 고개숙인 아버지, 밑바닥 인생의 주먹질부터 정재계의 권력투쟁까지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상대적으로 여성서사는 빈곤했다. 연민이 묻어나는 남성서사는 곳곳에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겪는 극적인 삶을 모두 경험한 아버지들도 현실에서 찾기 어렵다. 흥남철수에서 파독 광부,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 한 사람이 모두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윤제균 감독은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며 영화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이 영화가 신파적이라는 비판은 있었을지언정 공당의 대변인이 논평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어머니들도 힘들다’는 식의 유치한 글을 쓰진 않았다.

이 논평은 결국 “김지영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가 얼마나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며 살아왔나 하는 점”을 말하며 ‘우리 사이좋게 잘 살아요’ 식으로 마무리한다. 성역할을 ‘성별과 상관없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차별을 이야기할 때만 여성은 ‘성별과 상관없이’ 보편적 존재로 등극한다. 흑인이 겪는 의료, 교육, 주거 등 각종 차별을 이야기하는데 ‘백인도 살기 어렵다’고 말하며 인종과 상관없이 우리 서로를 이해하자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82년생 김지영>은 당연히 모든 여성의 서사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오히려 하나의 작품에서 모든 이야기를 찾으려는 태도야말로 다분이 차별적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그들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보편적이지 못한 존재는 늘 구체적이지 못하다. ‘보편적인 존재’로 위치한 이들은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들이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 그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지우려 한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따르는 작품이 있다면 보편성을 획득하는 작품이 있다. 전자는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 세월을 견디지 못하기 쉽고, 후자는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는다. 그렇게 고전이 된다. 고전의 힘은 독자적인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과 동시에 그 매력을 관통하는 보편성이 있어서다. <82년생 김지영>이 이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현재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바깥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현실은 훨씬 후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