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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이원조
1931년 일본 동경대 법정대학을 졸업한 원조는 그해 이관용(李灌鎔)1의 딸과 결혼했다. 이관용은 1919년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요구했던 인물이다. 원조는 일본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조선과는 다른 세상의 문화를 배웠다. 서울 혜화동에 신혼집을 꾸린 원조는 1935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일한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부터 원조는 문학 비평, 평론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지난 6월, 경북 경산 한 카페, 이원조의 6촌 동생인 이원성(90) 작가는 기자에게 제본된 시집 한 권을 보여줬다. 백석의 시집 ‘사슴’ 원본 복사본이었다. 함경도 사투리가 그대로 묻어난 백석의 시집은 지금도 문학계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이원성 작가는 해방 후 언젠가 원조의 집에 놀러갔다가 이 시집을 빌려왔다고 했다. 평론가 이원조에 대해 ‘장안의 삼재’, ‘조선의 삼재’라는 말로 모아진다. ‘장안의 화제’라는 말과 비슷한데, 조선에서 재주 있는 3명 중 한 명이었다는 말이다. 이원성 작가는 원조의 집에 가서 책을 보는 게 재밌었다.
“이게 백석 선생의 필적이라. 직접 써서 준거라. 내가 학교 다닐 때 ‘형님 날 주소’해서 가지고 왔어요. 이 책은 지금 지구 위에 한 권 뿐입니다. 원본은 (다른 사람에게) 갔고, 사본도 이 한 권 뿐입니다.”
“이게 뭐라고 적혀 있는 거에요?”
“이원조 씨, 을해 모, 모는 연말이란 말이라. 백석 증. 백석이 증정했다야.”
“백석 시인이 그때 유명했으니까, 그거를 이원조 선생한테 줬다는 건가요?”
“백석이 유명한기 아니고 이원조 씨가 유명한기라. 백석은 요새(요즘)와서 조명 받아서 아주 많이 알려졌지만은 그때는 문단의 위치로 봐서는 훨씬 이원조 씨가 윗급이지”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만들어진다. 원조는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문학건설본부 위원으로 참여한다. 중앙위원장은 이태준, 원조는 서기장과 평론부 위원장을 맡았다. 조선문학건설본부는 1946년 12월 조선프롤레탈리아트문학동맹(카프)과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한다. 좌익계 문인으로 구성된 조직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자 조선공산당이 통합을 요구한 것이다. 원조는 이때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 부서 구성을 위한 위원으로 선출됐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전국문학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첫 축사는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새 조선 건설에 암이 되는 것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특정한 계급을 위한 문학이 되지 않도록 ‘근로인민’을 위해 싸워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본인도 죽기 전에 한편의 시나 짧은 소설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들이 추구한 문학은 ‘인민’, ‘민족’, ‘근로인민’, ‘노동인민’, ‘프롤레탈리아’ 등 단어로 표현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원조는 “민족문학은 결코 우리 민족 어느 일부 소수인이나 특권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생활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이 아니”라고 말했다. ‘조선문학’을 건설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었다.
원조의 펜 끝에서 나오는 비평은 힘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일갈을 멈추지 않았다. 형제들과 함께 꾸던 꿈을 놓치지 않았다. 대회에서 원조가 발표한 ‘조선문학비평에 관한 보고’는 그와 형제들이 평생 했던 고민이 담겨있다. 1919년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분기점이었다. 당시 원조는 10살, 육사는 15살이었다. 형제들은 20대가 됐고,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여전히 조선은 식민지였고, 형제들은 다른 운동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 원조는 3.1운동 후 조선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민족해방의 한 영웅적 ‘에포크’인 3.1봉기의 격동이 지나간 뒤 당시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삼분오장의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지고 격동하였던 민중은 총검의 상흔과 허망한 절망감만 품게 되었다. (…) 그러나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3.1봉기의 민족해방운동이 지도자들의 몰계획성으로 일제의 무장 앞에 패퇴하자 지도자들은 지리멸렬했으나, 여기에 동원된 대중, 광범한 학생층, 인델리켄챠, 노동자들은 의연히 과감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 – ‘조선문학비평에 관한 보고’ 중
진정한 데모크라시
‘허망한 절망감’은 해방 후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됐다. 1945년 10월, 미군정 아놀드 장관은 북위 38도선 아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뿐이라고 발표했다. 조선의 정부가 일본에서 미군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있었다. 조선의 정부를 자처하는 두 그룹은 좌우로 나눠져 있었지만,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미군정이 정할 게 아니었다. 독립을 위해 싸웠던 시민들은 스스로 민주주의 정부를 꾸릴 준비가 돼있었다. 원조는 이런 방법이 “진정한 데모크라시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평론가 이원조(評論家 李源朝 談) 인민공화국의 찬부는 우리 인민의 자유의사로 결정될 것이고 어떠한 외부세력이나 지시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데모크라시의 방법인 때문에서다. 연합국은 우리 자주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앞으로 그러할 것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감사와 신뢰의 念에는 추호도 변동이 없다. 그러나 이번 아少將의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로 보면 우리가 신뢰하고 희망하는 정도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만약 인민의 의사로 결정된 인민공화국을 이렇게까지 모욕하고 능멸한다면 이것은 나을까. 각 정당에까지 간섭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문을 통하여 모욕적 언사는 단순한 동족애만으로서도 앉아 듣기에 불쾌하다. 우리가 신뢰하는 군정장관의 □기가 결코 이러하지 않을 것을 믿음으로 이것은 혹시 오해가 아닌가 의심한다. 하여간 군정관에게 요청할 것은 광범한 언로를 열어 가장 조선을 사랑한 지도여론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랄 따름이다.” – <자유신문>, ‘아놀드의 발표에 대한 각계지도자 담화 발표’, 1945.10.13.
우려했던 일은 그대로 일어났다. 그해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었다. 일본 패망으로 식민지에 갓 해방된 조선은 해결 대상 중 하나였다. 미국과 소련은 조선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한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다는 명분이었다. 이 소식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잘못 전해졌고,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 대립은 극에 달했다. 좌우 모두 조선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같았는데 말이다.
원조는 미소공동위원회가 5년 동안 한시적으로 조선을 신탁통치하면서 조선이 스스로 민주적인 정부를 구성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민주주의 독립 조선을 만드는데 미국과 소련이 뒷받침해준다는 믿음이 깨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 38도선 아래를 통치하는 미군정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설이 나돌았다. 미국과 소련의 싸움에 조선이 꿈꾸던 해방은 없었다. 원조가 지적한대로 미군정은 계속해서 좌우 분열을 조장했다. 독립운동을 해 온 인사들은 끊임없이 좌우합작을 위한 시도를 했다. 1946년 4월 <서울신문>의 ‘각정당사회단체, 단정수립설에 대해 견해 표명’ 보도에는 민의 총리(대한민국민주대표의원) 김구를 포함해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신민당, 공산당, 신한민당이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좌우를 막론하고 단독 정부는 계산에 없었다. 모두 12개 정당과 단체 중 원조는 제일 마지막 순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문화단체총연맹 이원조(文化團體總聯盟 李源朝 談) 모스크바3상회의(莫府三相會議)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순조로 진전되고 있는 이 때 돌연 미군정(美軍政)이 독자적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불원 우리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서려는 이 순간에 있어서 그 의회(議會)의 성과를 방해하는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분열을 정치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서 민주적(民主的)으로 수립된 신정부(新政府)를 갈망한다.” – <서울신문>, ‘각정당사회단체, 단정수립설에 대해 견해 표명’, 1946.4.7.
‘우리 악수할 날’의 기약
‘육사시집’을 발간한 1946년 9월 이후 서울에서 원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해 11월 조선문학가동맹이 펴낸 잡지 ‘문학 2호’에 원조의 편지가 실렸다. 원조는 소련에 있었다. 벗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온 것을 사과했다. 떠날 때는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소련에서 걸음을 멈추게 됐다고도 했다. 원조는 “우리 악수할 날도 그리 머지않을 겁니다”고 편지를 마쳤다.
결국 1948년 남한, 북한 각각 정부가 생겼다. 그때 원일과 원조는 북에 있었다. 38도선은 결국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됐다. 이후 원일의 행적은 알려진 게 없다. 원조는 북에서 황해도 문화담당책을 맡았다. 6.25전쟁 후 1953년 북에서 박헌영이 숙청될 때 조선문학가동맹을 함께 이끌었던 임화 함께 재판을 받았다. 원창은 6.25전쟁 때 형들을 찾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악수할 날’은 70년째 오지 않는다.
이옥비 씨는 삼촌들이 북으로 간 이유를 짐작했다. 북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통일된 나라를 원했던 사회주의 인사들이 많았다.
“유토피아 세계에 살아야 한다고 그러셨어. 기억이나요. 내가 하도 들으니까 유토피아를 안다. 우리 삼촌은 6.25 나기 전에 가셨잖아요. 이상주의 시대 때 간 거지. 그때가 한참 해방되고, 우리 아버지 형제분들은 백범 김구 선생을 추대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승만이 들어오니까 그래서 많이 갔죠. 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친일하는 사람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머리를 조아리고 싶지 않으시고, 그래서 아마 가셨을 거예요. 그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이옥비
원조는 전쟁 때 서울까지 내려온 적이 있다. 이원성 작가는 전쟁 중 원조가 서울에 내려와 본인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작가도 형님들이 북으로 간 이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북에 갔다는 거는 6.25 전에 알았어요. 이념에 따라갔지. 여기서 쫓아낸 게 아니라 자진해서 좋다고 갔는 거라. 사회적으로는 북한에 간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나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자기 이념 따라 간 거니까. 지금은 나라의 운명이니까 뭐 어쩔 수 없지” – 이원성
도움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강윤정 전)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부장(안동대학교 사학과)
이옥비(이육사의 딸)
김균탁 안동 이육사문학관
이원성(이육사 형제의 6촌)
최유창(이원조의 이질)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본부
석은동 대륜고 인문사회부장
참고문헌
이원기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이원록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이원기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10.31.
이원기·이원삼·이원일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1929.12.9.
이원록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5.4.
이원삼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1919.12.9.
이원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5.4.
이원삼·이원일 대구지검 집행원부, 1931.3.23.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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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경찰서, 이활 신문조서, 1934.
경성종로서, 이원일 신문조서, 1947.
교남학교 학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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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신문>, ‘광야, 꽃 – 이육사’, 194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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