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여성-잊혀진 경북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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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복식연구가, 기자 이여성이 꿈꾼 해방
몽양과 약산의 동지로, 실패한 좌우합작에 좌절
경북 칠곡군에서 사라진 이여성의 흔적

해방을 맞은 한반도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기 때문일까. 때가 무르익지 않은 탓일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정당과 지도자들은 반목했다. 주변 풍랑은 더욱 거세졌다. 열강의 갈등이 고조됐다. 종전 직후부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표면적으로 한반도 정부 수립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주판알 튕기기에 바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동상이몽의 장이었다. 미국은 남한 단독선거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추진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남한 단독선거가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동아일보의 가짜뉴스와 함께,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유엔한국임시위원단[미소 공동위원회] [사진=국가기록원]

해방의 여명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민족은 분단의 길로 향했다. 분단만은 피하려는 여운형,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에 나섰다. 일제 패망을 예견한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건국을 준비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여운형이 몸담은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미국도 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여운형은 다른 당파와 함께 합작 7원칙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미소냉전의 분위기를 뒤집을 만큼 다른 당파의 실질적 협력을 모아내지 못했다. 미군정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마음을 굳혔고, 좌익진영 탄압을 시작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됐다. 12월,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됐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좌측부터) 이상백, 몽양 여운형, 이여성. [사진=몽양기념사업회]

여운형 암살과 함께 좌절한 인물이 있었다. 여운형의 참모였던 이여성(李如星, 1901~?)이다. 그는 건준, 조선인민당, 좌우합작위원회의 요인이었지만,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행동하는 학자에 가까웠다. 학술과 이론, 해외 정세에 밝았던 이여성은 분단 없는 조국을 위해 일생을 던졌다. 사회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를 배척하라는 코민테른의 결정(12월테제)을 따르지 않고 약소민족의 민족국가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아일랜드,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을 통찰했다. 아일랜드 내전을 통해 약소민족의 독립 과정에서 방법론 차이로 민족 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여성은 해방 이후, 열강의 간섭과 민족 분열이 하나 된 국가 건설에 장애 요소라는 것을 깨닫고,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세계의 격동을 거슬러 꽃피우지는 못했다.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좌익 세력을 탄압했다. 이여성은 여운형 장례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장례식에도 개입했다. 이여성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 정책으로 1947년 8월 12일 구속됐다.1

분단에 저항하다 투옥된 이여성은 통일 조국이라는 비운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는 1948년 황해도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여성이 이북으로 향한 이유는 오늘날 정확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남한은 좌익 탄압 속에 암살되는 이들이 있었고, 결국 이승만의 주도로 단독정부가 수립돼 ‘하나의 조국’이 좌절된 참혹한 상황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여성은 이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지만, 후일 김일성에게 숙청됐다. 그 결과 이여성의 이북 행적 또한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이여성이 꿈꿨던 하나의 조국이란 꿈은 한적한 고서점 한켠에 먼지 쌓인 책처럼 작은 기록으로만 남았다. 오랜 세월 그 책을 다시 뒤져보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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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이여성의 초상, (오른쪽) 이쾌대. 모두 이쾌대의 그림이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브로슈어 촬영]

반세기가 흘러 1998년, 대구 중앙대로에는 훗날 부도로 사라진 제일서적이 성업 중이었다. 대구시민들의 대표적 약속장소인 이곳에 기대에 부푼 얼굴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이한용(당시 31세) 씨다. 오래 기다렸던 책이 발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기다렸던 책은 <조선복식고>이다.

<조선복식고>를 기다린 이유는 월북작가 이쾌대(1913~1965) 때문이었다. 이한용 씨는 1995년, 대백프라자에서 열린 이쾌대 회고전에 들렀다가 받은 충격을 잊지 못했다. <군상>(1948년 作)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거대한 화폭에 조선 민중의 생동감이 담겼다, 민중이 고통과 좌절을 딛고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듯한 모습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이중섭, 박수근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 때문인지, 생동하는 힘이 느껴졌다. 이쾌대의 형이 바로 이여성이다.

▲이한용 씨가 소장 중인 조선복식고

역사, 문화, 미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던 이한용은 <조선복식고>를 알아보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회갈색 빛으로 신라 시대 수렵도와 전통 의복이 그려진 <조선복식고> 표지에는 ‘주요 벽화 고분의 인물화를 통해 본 상대(上代) 복식의 변천사’라는 부제목이 달려 있다. 부제목 밑으로는 세로쓰기로 소박하게 저자의 이름이 적혔다. -이여성 지음-.

이쾌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여성은 알지 못했다.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이 고향인 이한용은 이쾌대가 살던 건물 일부를 매입해 살았던 인연이 있다. 이쾌대 일가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몰락했고, 일가가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해산됐다. 이한용 씨가 9살이 되던 해, 이 씨 가족은 그 집 중 일부를 매입했다. 성주 유촌 출신 양반이 먼저 매입한 이쾌대의 집을 나중에 이한용 씨 가족이 다시 매입했다. 이한용 씨 집에 찾아오는 마을 어른들은 이쾌대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곤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여성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제일서적에서 이여성이 남긴 <조선복식고>를 손에 들었다. 1946년 최초 간행된 <조선복식고>는 98년, 재출판 됐다.

▲1936.2.15. 동아일보에 실린 이여성의 그림.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이한용은 집2으로 돌아와, 이여성이 남긴 책을 들여다봤다. 담담한 문체에 담긴 기록. <조선복식고>는 삼국시대부터의 복식사에 대한 방대한 연구가 담겨 있었다.3

이여성이 중국 복식과 구분되는 전통 복식사 연구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건조한 문장 사이에서 작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문득 어린 시절 동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집을 찾아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오부잣집’, ‘월북’ 따위의 단어 몇 개가 떠올랐다. 이쾌대와 이여성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이경옥의 아들이었다. 오부잣집이라고 부른 것은, 대궐 같은 집이 다섯 덩어리라서, 혹은 그 일가 남성 어른이 다섯 명이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관직에 나간 선조가 여럿이기 때문인지, 오부잣집은 만석꾼으로 통했다. 개화사상을 일찍 접한 그 집안에는 테니스장, 운동장, 교회와 연못이 있었고, 한 골짝을 다 소유할 정도였다고 들었다.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동에 사는 이한용 씨를 만나러 갔다. 이 씨가 이여성의 ‘조선숫자연구’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복식고>를 넘길 때 들었던 미약한 박동 소리는 이한용 씨를 끌어들였다. 한겨레신문사 문화기행 프로그램을 하던 한용 씨는 그날 이후, 이여성의 자취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이여성, 이쾌대가 모두 월북하고 나서 그 집안은 명맥이 끊어졌다. 6·25전쟁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칠곡에서, 월북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저명한 화가라지만, 이쾌대 또한 해금4이 얼마 되지 않던 시기였다. 대학 친구들도 아는 이가 없었다. 지역 출신 인물의 전시와 아카이빙을 위해 칠곡군청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호국의 고장에서 어떻게 월북작가 전시를 이야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월북한 정치인 이여성의 이름을 꺼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여성 연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일부 성과는 있었다. 이여성에 관한 자료가 파편적으로나마 남아있었다. 전향하긴 했지만, 일본에서 잠시 사회주의 활동을 함께 했던 홍양명(洪陽明, 1906~?)이 남긴 글5에는 이여성의 인물됨이 나타나 있었다. 홍양명은 일본에서 이여성이 릿쿄대학 교복을 입고 일월회 대표로 연설에 나섰을 때 처음 만난 소감을 상세히 적었다.

“예술, 정치, 스포츠에 통달해 시대 감각에 예민한 조선에 잇서 가장 진보된 인테리의 하나라는 것을 누구나 수긍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그는 일개 쩌날리스트였으나 천박에 근(近)키 쉬운 신문기자 보담은 어데인지 무게 잇서보이고 무엇을 깁히 생각하고 잇는 듯한 과도기의 사회학도의 우울(憂鬱)한 면영(面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허-」하고 파안(破顔)미소할 때에 그에게는 전에 업든 범속(凡俗)에서 세련된 외교적 응대풍(應對風)이 좀 가미된 듯한 불유쾌한 점이 잇섯다.···특히 그는 모든 점에서 한 그룹 또는 한 붕당(朋黨)에 잇서서 타인을 리-드할만한 존경과 통제적 수완을 가진 사람이라고 늣겨지엿다. 이러한 이군(李君)의 인상이 악평(惡評)하면 「야심가」(野心家)라고 될 수도 잇슬 것이다. 그러나 이군(李君_은 비열한 야심가는 아니다. 물론 일에 대한 야심은 가젓다 할 수 잇스나 그는 평론이나 해설이나 능히 일가(一家)를 일운 사람이다.”(홍양명,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중 발췌)

연구를 이어가는 동안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모친이 암투병을 했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 한용 씨는 결국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만 했다. 연구자를 만나고 자료도 뒤져, 웃갓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살을 붙여 원고 한 편을 작성했다.

▲이여성의 가족들 [사진=책 이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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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호생에게 남긴 이여성의 편지
(이 글은 이여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이야기를 활자 기록 외에는 마땅히 접할 수 없어,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쓴 것이다. 하지만 당장 어려운 사정에 빠져, 이 이야기를 따로 발간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네 나이쯤 됐을 때, 나는 네 삼촌들 약수, 약산과 함께 만주에 있었다.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 몰래 땅을 판 자금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려고 했었지. 다시 생각해보면 네 할아버지도 모른 척 지지해 주셨던 것 같아. 우리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맡았지만,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단다. 나는 훗날 만주에서 말고도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집안 재산을 썼어.

만주에서는 목표로 하던 일을 이루지는 못했어. 땅을 일궈 둔전을 하는 둔전병을 꾸릴 생각으로 약산에게 자금을 줬는데, 길림에서 그만 김좌진 선생에게 그 자금을 줘버린 거야. 그때 명고옥이라는 일본 여관에서 약산이 투숙하는데, 독립군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받은 거지. 그런데 상황이 급작스럽게 바뀌었어. 삼일운동이 일어난 거야. 그때 우리는 조선의 정세를 지금처럼 치밀하게 알지는 못할 때였어. 우리는 무골의 기개로 조선독립에 역할 하고 싶었어. 우리는 논쟁 끝에 약산만 남고 귀국을 결정했어. 의견이 합해지지는 않았지. 약산은 무장투쟁을 고집했지만, 나와 약수는 지금 정세는 국내에서 대중을 기초로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결국 우리는 약산은 북쪽을 지키고, 약수는 중앙을, 나는 남쪽을 지키자면서 헤어졌지.

귀국하자마자 나는 대구로 왔어.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대구고보에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학생들의 원성이 대단했었단다. 나는 그때 여기서 수학하던 고향 친구 이영옥, 이수건, 이덕생이와 같이 혜성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했어. 출판을 배포해 민심을 선동하고, 장기적으로는 만주 지방의 단체들과도 연락을 취하려고 했어. 만주에서 돌아온 나는 연락책을 맡았지. 국내의 고립된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어. 우리는 근고동포(謹告同胞)라는 문건을 만들어 칠곡이나 대구에서 배포했고, 관공리들에게는 경고문을 보냈어. 그러다가 우리들은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버렸다. 나는 왜적의 법률 위반6으로 옥살이를 했어.

▲경북 칠곡군 웃갓마을, 이여성의 옛 집터가 남아 있는 곳.

출소하고 나서 나는 일본에 갔단다. 당시 국내에는 신사상을 수학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어. 약수도 미리 일본에서 수학하며 사상운동을 하고 있었지. 이때부터 나는 지금껏 정처 없는 떠돌이처럼 돼 버렸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후회는 없다. 일본에서 네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너를 낳았다. 내가 모색한 모든 것이 실패했음에도 단 하나 성공한 일이 있다면 너를 낳은 것이다.

너희 어머니는 삼월회 회원이었어. 나는 일월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많았지. 일월회는 내부 갈등도 많았지만, 운동 전선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모아 사실상 다른 재일 동포 단체를 통솔하게 됐단다. 나는 그때부터 일본 경시청 요시찰인물이 됐어. 잠시 국내로 들어가 순회 강연회를 열었고 그때는 고향 대구에서 검거되는 일도 있었지. 1925년부터 일본 순사가 조선공산당 당원 검거를 시작하자 요시찰 인물인 나는 활동이 어려웠어. 그래서 먼저 상해로 건너갔고, 네 어머니는 이태리 유학을 가고 싶어 고민하다가 결국 상해로 따라왔단다. 우리는 상해에 아바트멘트를 얻고 피신했다.

그때는 온 세계가 혈전에 몰두했단다. 중국은 내전 중이었는데, 국민당 편의대가 패주하면서 우리 아바트멘트까지 검은 피가 흘렀어.7 작정 없는 탄환에 시민들도 즉사했다. 나는 상해 북부정류장에 갔다가 급히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공포에 빠진 네 어미가 보였다. 팔을 잡아채서 달음박질을 쳤다. 인도 병사를 앞세운 영국군도 보였어. 제국주의의 민얼굴을 이때 보았단다. 약소민족의 독립으로 이 비극에서 탈출해야 해.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세계적 혁명에 중요한 요소이니, 그 중요성은 국내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질 바 없는 것이야.

상해에서 고초만 겪은 것은 아니야. 고난 속에서도 환희는 있단다. 네 어미는 상해에서도 노래 공부에 열심이었는데, 상해 제일가는 칼톤 캅페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가 기억난다. 중세기 불란서 여자의 복색처럼 허리를 잘눅하게 묶고는 머리에 관을 썼었다. 무대 정면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낙심한 사람의 얼굴이었어. 실연(失戀)이라는 곡목에 맞게 애조를 띤 목소리에, 그만 이국의 정조와 향수에 잠겼었지. 네 어미는 사실 계집애 한 명을 낳았었단다. 그 애를 낳았을 때 울음소리 몇 번을 못 내고 그만 죽고 말았어. 나는 바깥에 나가 담요를 하나 사서 어린 송장을 꽁꽁 묶었고, 침대 아래에 두고 우리는 침대 위에서 울면서 날을 보냈단다. 그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너를 더욱 애틋이 길렀단다. 네 어미가 건강이 점점 나빠져 1928년 귀국하고 나서, 호생이 너를 낳았어. 너는 유달리 양식거리를 가렸단다. 젖이 부족해 미국제 젖 가루를 주니 먹지 않았어. 남의 젖도 먹지 않고 꼭 어미젖만 찾는 통에 어미가 애를 많이 썼었다. 그 덕인지 너는 유행 감기에도 빠졌고 앓지를 않았어.

귀국을 결심할 때 나는 나대로 피신을 끝내고 국내에서도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북경에서 약산에게 국내 정세를 전해 들었거든. 다시 들어와서는 쩌날리스트로 활동했단다. 이때 일본에서 만났던 홍양명이라는 사람과 재회했는데, 그는 나더러 쩌날리스트 보다는 사회학자 같은 면모로,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고 하더라. 실제 나는 주로 평론과 사설을 썼지. 조선 독립에 참고할 수 있는 약소민족 연구에 몰두했고, 신문에 발표했어. 해방 이후를 바라보며 우수한 조선 민족의 문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일도 했어.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에서 기자 생활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나는 1936년 동아일보를 나가야 했어.

▲1945년 해방 후 건국동맹회의, 서울YMCA [사진=몽양기념사업회]

그 후 나는 여운형 선생과 함께 회합해 정치운동가가 됐다. 그와 나는 뜻이 맞았어. 어떤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상황과 정세에 맡게 판단하려고 했어. 사회주의를 따랐지만,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단을 면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는데 조선인들은 저마다의 속내로 합심하지 못했지. 각인각파의 대동단결이 절실했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귀국할 때도 환영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포용해서 좌우합작을 하려고 했어. 그 길만이 통일 조국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여운형 선생은 결국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 참담하더구나! 나는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또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어. 미소공동위원회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미소 양국은 결국 분단의 길을 택했구나.

호생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남지 않았다. 출옥하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했구나. 그렇지만 나는 얼마간은 북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아주 못 보지는 않을 것이다. 너를 낳고도 나는 바깥으로만 돌았구나. 하지만 네가 살아갈 나라가 서로 분단돼 반목하는 나라이길 바라지 않는다. 북조선에는 조만간 남북연석회의가 열릴 것이다.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 추세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인 것 같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한다. 다시 만날 것이다. 우선은 급히 너에게만 편지를 남긴다.

-1948, 청정(靑汀) 이여성

이여성, ‘민족’과 만나다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에 나서다
3·1운동 일어나자 귀국해 혜성단 활동, 투옥까지

이여성의 출생지는 달성군 수성면(지금의 대구시 수성구)이다. 이여성의 부친 이경옥은 창원 현감(조부 이선형은 금부도사)을 지낸 부호로, 대구와 경북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다. 이경옥의 본적은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39번지인데, 제적등본 상 1917년 2월 20일 달성군 수성면 지산동 498번지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사한 즉시 실거주지 신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여성이 출생한 1901년에는 이경옥이 살았던 지산동에서 함께 살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여성의 아버지 이경옥의 제적 등본

한편 칠곡군 신리가 이여성의 출생지라고 여기는 연구자나, 대구 계산동 일대가 출생지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만 출생지가 어디든 신리 웃갓마을 자택 부지에 학당이 있었으므로, 이여성은 어린 시절 주로 칠곡을 중심으로 계산동, 지산동을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는 이여성이 1909년에 상경해 보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성장한 지역이면서, 1919년 3·1운동 발발 후에는 혜성단에 소속해 활동한 무대이기도 했다. 대지주·양반층이 비교적 두껍지 않아, 엘리트 계층이 비교적 일제에 포섭되지 않은 곳이다. 이경옥의 집이 있던 곳 중 하나인 계산동은 개신교 중심지로 한발 앞서 개화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었다. 이여성 일가는 계몽사상은 물론, 신리 땅에 예배당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기독교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풍족한 재산, 개화된 가정은 이여성이 원하는 학업과 활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웃갓마을의 이여성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
▲이여성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수성구 지산동 집터 부근

웃갓마을 주민 강성희(92) 씨와 이한용 씨에 따르면, 칠곡 자택의 땅은 5천여 평에 이른다. 여기에는 예배당, 정자, 학교와 운동장도 있었다. 현재는 생가터는 물론, 담장조차 남아있는 것이 없다. 대부분 농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 토지에는 철도가 생겼다. 풍족한 집안을 기반으로 이여성은 일생동안 만주, 일본, 상해, 서울, 평양을 활동 무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 후 대구에서 혜성단 활동을 할 때 집안의 땅문서를 팔아 자금을 댄 것도 이여성이었다.

이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민족’이다. 훗날 일본 유학 시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시절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한반도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기본적인 의식이었다. 이여성의 최초 민족주의적 행보로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선 것을 꼽을 수 있다. 역도, 테니스 등 스포츠를 즐기고 소질도 있었던 그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

이여성이 보성학교 4학년이던 1917년,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이 있었다. 당시 학생 시계 분실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학생 신체검사를 했는데, 4학년 학생의 주도로 경찰을 학교에 불러들인 사태 규탄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 개입 배후에 일본인과도 연관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으로 발전해 2, 3, 4학년이 동맹휴학을 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여성은 이 사건을 주도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퇴학원을 제출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 사건을 민족주의 운동의 시초로 보기도 하지만, 최재성 교수(성균관대)는 처음부터 민족적 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학내에 경찰이 들이닥친 상황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이여성은 1918년 3월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 약산·약수와 인연은 약산의 고모부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이들 셋을 의형제로 맺어주며 시작됐다. 1918년 약산은 중국 톈진에서 유학하던 중 일시 귀국한 상황이었고, 약수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상황이었다. 약산과 약수라는 이름은 황상규가 지었다. 이때 이명건(李明建)은 별과 같다는 의미의 여성(如聖)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평생 ‘이여성’으로 살았다. 약산, 약수, 여성은 서로 다른 사상으로 진정한 민족 해방이라는 과제를 향해 나갔다.

이럭저럭 심한 객고를 약 6개월 격고 잇는데···길림으로 향하엇다. 그곳에 가서 둔전병계획을 실행하고저 함이엇다. 둔전병이라 함은 평시에는 집단적으로 부락을 이루어 농경을 하여 생활의 안전을 엇다가 일단 유사할 때에 이러나도록 그에 필요한 무예 등을 습득케 하는 일이엇다···이 일에는 만흔 자금이 든다. 그것은 R군의 힘을 기대하기로 되엇다. 아무튼 나는 이 일을 성공식히기 위하야 요노인들과 맛나불 필요상 천진에도 두어번 단녀오고 북경, 상해, 남경 등지로도 여러번 왕래하엇다···이리하는 사이에 세계대전 종결의 뒤를 이어서 안에서는 긔미운동이 이러낫다. 밧갓흐로 날려드는 여러 가지 정보에 외지에 잇슬 때 아님을 깨다른 R군과 나는 意見를 달니하는 K군을 국외에 둔 채로 조선 안에 드러왓다 (김약수 저, 나의 해외 망명시대 중 발췌)

약수의 글에 언급된 ‘R군’이 이여성이다. 이들은 이때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의 일환인 둔전병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당시 세 사람 모두 사회주의 사상은 접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상적 기반이 있다기보다 활동 지향적인 이들의 성품 때문으로 보인다. 약수는 “더군다나 합병된 이래 조선청년 사이에는 문약(文弱, 글만 받들고 실천은 하지 않아 나약함)의 가통(可痛, 통탄)할 풍조가 흘너서 도모지 사면을 바라보아야 굿굿한 상무적(尙武的, 무예를 지향하는) 기개라고는 차즐 수 업섯슴으로 이를 분개하는 나마에 내 한 몸이라도 반드시 군인이 되지 안으면 안 되겟다고 각오 하엿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일제 경찰은 당시 이여성이 마련한 돈이 4만5천 원이라고 했다. 이는 이여성이 부친 이경옥 소유의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이경옥 몰래 팔았는지 묵인 하에 팔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둔전병제 계획을 준비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다. 3·1운동은 이 셋의 독립운동의 분기점이 됐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방법론으로 무장투쟁론을 선택했고, 약수와 이여성은 3·1운동 정세 속에서 대중투쟁론을 선택했다. 이여성과 약수는 곧바로 귀국했다. 이여성은 대구에서 3·1운동의 일환으로 혜성단 활동을 시작했고, 약수는 서울에서 노동공제회 활동에 나섰다. 약산은 길림으로 가서 의열단을 창설했다.

혜성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조직으로, 이여성은 혜성단 활동을 통해 그의 대중투쟁론을 실천했다. 혜성단은 3·1운동 이후 대구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상인들의 폐점 철시 유도,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암살 협박문 발송, 노동자 파업 등에 나섰다. 이여성은 혜성단에서 연락책이었다. 혜성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도 연대를 꾀했으나, 일본 군경의 감시망에 걸려 주요 활동가들이 검거됐다. (관련 기사=대구 곳곳 3·1운동 재현···100년 전 대구는 ‘3·8만세운동’) 이여성은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대구복심법원 재판부의 판결문. 이여성(이명건)은 1919년 7월 19일 1심(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10월 9일 대구복심복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여성은 최재화(崔載華) 등과 함께 일제에 대한 경고문 문안을 만들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명건은 당시 20원을 내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이여성, ‘사회주의’와 만나다
일본 유학 중 소프라노 박경희 씨와 결혼
상해로 피신했다 귀국 후 기자 생활

이여성은 1세대 사회주의자였다. 장규식 중앙대학교 교수는 초기 한국 사회주의를 1922년 코민테른 4차대회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통일전선론이 제기된 후, 조선공산당 창당 전후 활동한 그룹을 1세대, 1928년 6차 대회 후 ‘계급 대 계급’ 전술에 따라 당 재건, 혁명적 노농운동을 한 그룹을 2세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조선신민당을 이끈 그룹을 3세대로 구분한다. 1세대 사회주의자는 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을 모색한 특징이 있다.

대구형무소 출소 후 1922년 이여성은 동경 기독교계 학교인 릿쿄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식민시대 조선에는 교육기관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교육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것이 오히려 용이했다. 김약수는 1920년 한발 먼저 일본대학에서 수학 중이었다. 김약수가 창간한 신문 <대중시보>(大衆時報)에서 그는 “언론의 효과를 일층 나타내기 위하여서는 조선보다 동경, 오사카 등지가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여성 군과 나는 동경에 들어가 처음은 대중시보를 창간하다가 말기에 북성회의 조직에까지 이른 것이다”라고 썼다. 김약수는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고, 뒤이어 일본에 유학 온 이여성도 김약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인에 대한 시정관계잡건-재경 조선인 상황’ 문서. 이여성은 27세 학생으로 기록돼 있다. 이 문서에는 이여성뿐만 아니라 박열 등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같은 조선 독립운동을 지지한 일본인들도 기록돼 있다.

이 시기, 이여성은 기독교적 사상을 넘어섰다. 1923년 1월, <조선일보>에 전선의 운명론이란 제목으로 게재된 이여성의 글에는 이렇게 쓰였다. “신인(神人) 관계의 추상적 윤리설에 대해 그 무지를 통적(痛摘)코자 하나이다.···신(神)의 존부를 회견(懷譴)하는 현대인은 이제로부터 신을 축(蹴)하고 자아를 기(起)하며 신의 영자(影子)인 운명을 척(擲)하고 자아의 노력에 소(訴)코자 하는 것이외다.”

이여성은 재일 조선인 학우회, 북성회, 일월회 등 다양한 조직 활동을 시작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김인덕 성균관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1912년 결성된 학우회에는 안재홍, 송진우, 김성수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여성은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이여성은 훗날 안재홍과는 좌우합작운동을, 송진우와는 동아일보를 함께 하는 인연이 이어진다. 이여성은 학우회 활동의 일환으로 부산에서 함흥까지 이어지는 순회강연에 나섰다. 1923년 7월, 대구 조양회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이여성이 연사로 나섰는데, 이 때문에 검거돼 대구 검사국에서 20일간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8.

북성회 해산 뒤 이여성은 사회주의자 써클 일월회 창설에도 함께했다. 일월회는 1월에 사망한 혁명가 카를 리프크네히크와 레닌을 기려 지은 이름이다. 재일 조선인 단체의 중추로, 여러 단체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여성 조직 단체인 삼월회9도 일월회의 지도를 받았다. 삼월회에는 소프라노 박경희(朴慶姬, 1901~?)도 소속돼 활동하고 있었다. 박경희는 평양 출신으로, 동경음악대학교에서 유학 중이었다. 실력 있는 소프라노였지만 일본에서 ‘사의 찬미’로 유명세를 얻은 윤심덕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10.

박경희가 남긴 글에는 이여성이 피신을 위해 일본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경희가 쓴 ‘동란의 상해, 일음악가가 애아시체를 안고 울든 기록’7에 보면 이여성은 1920년대 중반 이미 상해로 피신했고, 박경희도 이여성을 따라 상해로 향했다. 제적등본 상에는 이들이 상해에서 혼인을 맺은 것으로 나온다.

이여성의 상해 피신 이유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신용균 교수는 1925~1926년 일제의 조선공산당 대규모 검거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홍양명(洪陽明, 1906~?)은 당시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28년 체포된 뒤 훗날 전향했다. 1932년 홍양명이 남긴 글(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11)에는 이여성이 처한 당시 상황과 이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29년 이여성의 귀국에 대해서 신용균 교수는 아내의 건강 악화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원봉을 만난 후 국내에서도 검거를 피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동아일보에 실린 이여성의 그림.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 그는 서울 중학동12에 정착했다.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1932년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으로 구속되고 나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사장으로 오자 조선일보를 떠났다. 1932년 10월 <동아일보>에 들어갔을 때 과거 인연이 있었던 송진우, 김성수 등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당하자 1936년 12월, 동아일보도 사직했다.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는 동안 이여성은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민중의 삶에 깊은 애착을 기반으로, 실증적 연구 방법을 도입한 저작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약소민족운동>, <수자조선연구>, <조선복식고>이다.

▲이여성은 복식, 그림에 대한 글 이외에도 다양한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 글은 1935년 1월 1일부터 23일까지 14회 연재한 ‘공업조선의 해부’ 기사다.

이여성이 원했던 민족적 사회주의, 그리고 통일 조선
여운형과의 만남, 꽃피우지 못한 좌우합작의 꿈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이여성
“촛불혁명 이후 한국, 이여성의 사상을 발굴할 때다”

해방 직전, 이여성은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선다. 여운형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여성은 1944년 여운형이 추진한 건국동맹에 가입했다. 여운형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자료는 특별히 없지만, 신용균 교수는 둘 다 언론 활동과 체육 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공통점, 사상적으로도 동질성이 있다는 점 등으로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인 각파의 대동단결’이라는 건국동맹의 활동 방향은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했던 이여성의 사상과도 들어맞는다. 1945년 일제 패망이 가까워지자 이여성은 여운형의 지시를 받아 국호, 국기 제정과 정치, 경제, 문화 등 건국을 위한 전문적 조사 연구 작업을 진행했다.

해방 후 이여성이 추구한 길은 좌우합작운동이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의 간부를 맡았다. 건준에서 여운형의 지시를 수행하는 등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좌측부터) 이상백, 몽양 여운형, 이여성. [사진=몽양기념사업회]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후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조직이었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945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인공 문제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한국민주당, 이여성의 성명이 나와 있다.

하지 사령관은 “조선의 안정과 독립을 위하여 나가는 진로에 계속적으로 생기는 오해와 지연을 금할 필요가 있어 나는 주도한 생각과 숙고를 한 후 여러분에게 이 성명을 발표한다···조선인민공화국은 정부도 아니고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권리가 없다. 남부조선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정부는 연합군최고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수립된 군정이 있을 뿐이다”라며 “조선 내에 있는 미국인과 군정은 정당이나 정강을 가지고 시비를 하자는 것도 아니요 탄압하자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훗날 이승만의 단정수립론을 지지한 한국민주당도 “우리당으로서 이미 인민공화국해산명령을 발동하도록 임시정부에 건의까지 하였으니 금일 군정청으로서의 조치는 당연하다”라고 호응했다.

이여성은 하지 사령관의 성명에 대해 “인민정부의 수립은 조선의 현실정태에 미루어 가장 필요하고 필연적인 일”이라며 “해방조선의 신정치는 자체의 특수성을 잘 파악해서 선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통일의 완성에 만사는 해결된다···군정당국에서도 통일공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라는 반박 성명을 냈다.

▲1947년 몽양 여운형의 장례식에 참석한 시민들. [사진=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미군정의 지지에 따라 정부 수립 주도권은 임시정부에 있었다. 이여성은 정부통합운동을 포기하고 정당통일운동에 나섰다. 인민당, 한국국민당,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임시정부와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에 관한 입장을 밝힌 4당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는 성과도 냈다. 4당 코뮤니케는 좌우 주요 정당의 유일한 합의였는데 한민당 등 보수파의 입장 전환으로 하루 만에 파기됐다. 이번에는 신한민주당도 참가 시켜 5당 회의를 수차례 더 열었으나,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다. 정당통일운동에 실패한 이여성은 미소공동회의 대응에 주력했다. 미소와 좌우익의 대립이 임시정부 수립에 악영향을 주는 상황이었다. 미소공위는 결렬을 거듭했고,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2차 미소공동회의가 열리던 즈음 여운형이 암살된다. 여운형의 암살은 가시적 성과 없이 유지되던 좌우합작운동에 큰 타격이 된다. 국사편찬위원회 作 <국사관논총>에 따르면, 1947년 7월 19일, 극우단체 청년 한지근(韓智根)이 여운형을 암살13했다. 한지근은 법정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박헌영·여운형·송진우 등 국내를 혼란하게 하는 지도자는 다 죽여야 나라가 바로 서겠기에 감행한 의거인데 무슨 잘못이냐”라고 말했다.

암살 직후, 미군정은 테러 배후에 대한 조사보다 여운형 계열 인사 탄압에 나섰다. 1947년 8월 12일, 미군정은 8·15기념식을 앞두고 좌익세력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구실로 좌익계열 정치인을 대량 검거했다.14 이때 이여성도 검거됐다. 좌익 세력은 8월 15일 해방기념대회를 명목으로 대규모 군중 투쟁을 계획했지만, 미군정은 선제적으로 민전 산하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 검거를 시작했다. <국사관논총>에 따르면, 이 일로 8월 11일부터 23일경까지 약 2천 명이 체포됐고, 그중에는 이여성을 비롯해 백남운, 장건상, 이기석 등 좌익 세력 요인들도 포함됐다. 좌익계 인사들은 남한 사회에서 사실상 추방된 셈이다. 좌익 탄압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여성이 언제 풀려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남측에서의 활동 기록도 없다. 다만 1948년 4월, 민전과 근민당 간부들이 평양으로 향했고, 그 길로 평양에 남았기 때문에 이여성도 그즈음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용균 교수는 이여성의 월북이 북한 정권 수립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여운형의 암살과 중도좌파에 대한 탄압으로 활동할 공간을 잃은 상황에서, 북한이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했지만, 1948년 초에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이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다만, 가족을 모두 두고 혼자 월북한 점으로 볼 때 완전한 분단으로 교류가 끊기는 상황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월북 후 이여성은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조선 미술사, 건축사 등 학술연구와 저술에 매진했다. 1956년에는 조선역사가민족위원회 중앙위원이 됐고, 1957년에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좌를 맡았다. 1958년에는 석굴암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이후 드러난 공적 활동은 없다. 이 때문에 이즈음 김일성으로부터 숙청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은미가 쓴 ‘조선독립의 물꼬 튼 영원한 민족주의자 이여성’에는 이여성의 딸 이미생 씨의 증언이 나온다. 1960년경 귀순한 김일성대학 교수가 증언하기로, 역사학 강좌장을 맡던 이여성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학문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발언했다가 순천의 도자기 공장에 화공으로 쫓겨 갔다고 했다. 이여성이 숙청되는 시기, 북한에 있던 김약산, 김약수도 숙청됐다. 길은 달랐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조선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신했던 이여성, 김약산, 김약수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신용균 교수는 이여성을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노동자의 국제적 계급투쟁을 말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약소민족국가의 해방이 중요한 사회주의자의 과제라고 여겼고, 국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코민테른의 12월테제15에 단호히 반대했다. 식민지 조선 민중의 해방, 민족국가건설이 목표였다. 하지만 격변의 시기, 그의 신념은 빛을 보지 못했다.

신용균 교수는 한국 사회가 4·19 혁명, 5·18민중항쟁, 6월항쟁을 거쳐 21세기 촛불혁명을 겪은 지금에서야 이여성의 사상을 다시 제대로 살펴볼 기반이 다져졌다고 주장한다. 신 교수는 “전후 남한 역사 발전은 분단으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곧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다. 지금에 와서야 겨우 해방 공간에서 여운형, 김규식이 이야기했던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좌우 남북 합작이 주장했던 통일.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라며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이 힘을 받지 못하고 극좌와 극우로 분열된 것이 한국의 비극이다. 분단은 공간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한 사상마저도 추방시켰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이여성이 살아 있었다면 서훈은 준다고 해도 안 받았을 거다”

약산 김원봉 서훈 논란 정치쟁점화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이여성(李如星, 1901~?)을 취재하던 중 만난 한 연구자가 한 말이다.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여성은 해방 이후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좌우합작운동 나섰다. 이여성은 1947년 여운형 암살, 이어진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옥살이를 했다. 이여성은 출소 후인 1948년 월북했다. 특별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분단이 굳어지는 분위기와 남한 사회 내 좌익 계열 탄압 분위기를 따져보면 월북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숙청됐다. 남북에서 모두 추방당한 이여성을 연구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해방 전 남한에서 이여성은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인지 당대 신문 기사나 저명인사들의 회고록에 등장하고, 자신이 쓴 기사와 저서도 다수 남아 있다. 이런 기록을 기반으로 이여성 관련한 연구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연구자 중에서도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는 이여성의 생애, 사상, 예술론까지 집대성했다.

신용균 교수는 좌우합작운동 실패,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 분단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 분단마저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정신적 분단 상태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극단화됐고, 이여성이 그러했듯이 “다른 것을 추구하면 제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분단을 극복하려는 다른 축의 힘도 있었다. 신용균 교수는 “그 힘이 4월 혁명, 5월 광주, 6월 항쟁, 지금의 촛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다시 이여성이 추구했던 ‘좌우합작’,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이여성에 대해 연구하게 된 계기는?
=민주주의, 민족 통일, 분단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왔다. 해방 공간에서 소외된 사상을 살펴봤더니, 극좌와 극우의 사상만 남더라. 여운형과 김규식이라는 중도 좌우파의 사상은 잊혔다. 그들의 풍부하고 많은 경험과 사상이 남북한 모두에서 상실됐다. 여운형을 추적하다 보니 이여성이 나오더라. 여운형의 참모 역할이었는데, 볼수록 흥미로웠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편향되지 않았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이여성의 인간적 모습은 어땠을까?
=양반 가문에, 무관직을 지낸 부유한 집안이었다. 결정에 망설임이 없고, 판단만 내리면 그대로 실행한다. 보성학교 재학생일 때 동맹휴업을 주도했는데, 그런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다. 창원현감을 지낸 아버지 이경옥 몰래 토지 문서를 내다 팔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만주로 갈 때 땅 팔아서 6만 원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지금 가치로는 수십억 정도인데, 아마 실제로는 아버지가 지원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자신감, 재능, 성격 등에 영향을 줬을 거다.

▲이여성의 아버지 이경옥의 제적 등본

그런 쟁쟁한 가문이 지금에는 왜 아무런 흔적이 없는가
=좌익이고 월북을 했다. 이쾌대도 월북했다. 10년 전쯤 논문을 쓸 때, 그때는 조사하러 가면 그쪽 지역 사람들은 좌익에 대해 묻는 것조차 적대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동생 이쾌대는 복권됐다. 북한에서 나오는 미술가 편람을 보면 이쾌대는 있는데 이여성은 없다. 북한에서는 복권되지 않으면 관련 이야기 자체를 찾을 수 없다.

이여성은 약소민족에 애착 갖고 연구를 했다. 조선 독립과 연관 지어서 연구했을 것 같다. 유사하게 당시 공산주의 방향도 반제국주의 흐름이 있었다. 이여성의 사상을 민족적 사회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에 관심 있으니 자연스럽게 약소민족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을 거다. 공산주의의 핵심이 계급 관계인데, 이여성은 이 관점을 제국주의 국가와 약소민족의 관계로 원용한다. 코민테른이 민족주의자를 배제해야 한다는 12월테제를 발표했을 때에도 유지했다. 신간회 해체에도 이여성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여기서 차이점이 생긴다.

이여성의 사상적 특징은 어떤가?
=이여성 사상의 요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다. 의회를 통해 합법적 선거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해 사민주의 경향도 있다. 통일 방법론은 좌우합작과 신간회 이후의 민족유일당을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민족주의자에서 출발한 이여성은 일본 유학 중 대정민주주의(다이쇼데모크라시, 大正デモクラシー)를 접한다. 후에 무산정당 운동에 주목하게 된다. 합법적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고, 의회에서 입법을 통해 사회주의를 한다는 것이다. 이여성은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따져봤다. 의회를 통해야 한다는 방법론은 건국 과정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지금 진보정당이 대체로 사민주의를 추구한다. 이제야 사민주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이야기가 이미 해방공간에서 있었던 것이다. 이걸 복원하는데 반세기가 지났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1947년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발족했다. 임시위원단 대표단에는 시리아, 인도, 호주, 캐나다, 엘살바도르, 중화민군, 필리핀, 프랑스, 우크라이나가 참여했다. 남북 총선거 실시를 위해 임시위원단은 공산주의자들과 면담을 시도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해당 문서에 면담자들의 정보가 나와 있다. 김원봉, 이관술, 백남운 등과 함께 이여성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여성은 경찰의 감시를 받지 않고, 서울 모처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나와 있다.

당시 중도파들의 사상이 힘을 받지 못하고 쇠퇴해서, 그 부재가 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2차 세계대전 후 신탁통치를 받으며, 좌우익이 협력했다. 이후 10년 뒤 독립했다. 한국과 다르다. 해방 후, 통일국가 건설이 과제라면 여기에 구심력과 원심력이 작용했다. 구심력은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힘이었고, 원심력은 극좌, 극우 양극단이었다. 구심력이 약했다. 결국 분단을 초래했다. 분단은 우리 사고방식마저 바꿨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이분법적 사고다. 공존, 합의, 타협, 협상. 이게 없어지고 극단적 주장만 남았다. 지난 반세기의 일이다. 다른 걸 말하면 제거된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제거됐다. 민주주의자니까 그렇다.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정신적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다. 4월 혁명, 5월 광주, 6월 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까지도 이어진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다. 해방공간에서 김규식, 여운형이 이야기했던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좌우합작, 남북합작. 이런 것이 지금에 와서야 겨우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남북합작, 공조와 합의라는 구심력이 힘을 받지 못한 것은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이걸 다시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피땀을 흘렸나.

해방 후의 모습과 지금 사회의 모습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꼭 지금 사회가 사상의 자유 측면에서 꼭 발전했다고 볼 수도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해방 공간에 보배 같은 수많은 사상이 나왔다. 극단을 빼고 배제하는 사회가 되면서 우리의 풍요로운 경험이 묻혔다. 이걸 다시 복원해야 한다. 북한,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 처벌받던 시기도 있었다. 내가 59년생이라서 일제시대, 해방, 이런 것이 내게도 역사일 뿐이다. 역사는 역사로 보고 객관적으로 보면 된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했고, 북한에서 고위직을 했으면 둘 다 사실로 보면 된다. 이여성도 마찬가지다. 추종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면 된다. 역사를 정치적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역사로 무엇인가를 정당화하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왜곡된다.

이여성과 백선엽, 누구를 기억하느냐

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턱 막혔다. 이여성이 직접 쓴 기사, 저서는 남아있지만,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혈육과 연락할 방도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칠곡, 대구 수성구 생가터 인근 주민들을 만나 수소문했다. 연구자들, 이여성 관련 기사를 썼던 기자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만 들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이여성 동생 이쾌대의 아들(故 이한우 씨)을 아는 연구자와 연락됐지만, 그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다.

주로 이여성을 연구한 신용균 고려대 연구교수와 이한용 씨로부터 사실 확인을 했다. 이외에도 웃갓마을 주민, 칠곡문화원, 이쾌대의 후손을 아는 연구자,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등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이여성 일가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여성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절 쓴 기사를 통해 그의 사상이나 당시 한반도 정세와 살폈다. 하지만 본인의 삶과 고뇌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꼭 연고자를 찾고 싶었다. 칠곡군 신리로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향했다. 앞서 칠곡문화원장, 신리 마을 이장과 동행해 예전 이경옥(이여성의 아버지)의 집이 있던 터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곳은 철도가 놓이고 농지로 개간돼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신리 집터 근처 빈집을 뒤지고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에게도 수소문했다. 이경옥의 집 일부가 절간에 팔렸다는 이한용 씨의 말에 인근 사찰도 찾아봤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생가터로 추정되는 주소지의 폐가 창고를 뒤져봤는데, 이가(家) 족보를 발견했다. 이여성 가문인 경주(慶州) 이씨 족보로, 생가터를 찾을 줄 알고 잔뜩 흥분했다. 자세히 보니 광주(廣州) 이씨 족보였다. 혼자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운이 없지는 않았다. 되돌아오려는데 밭을 일구던 한 노인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마을 최고령자 강성희(92) 씨에게 데려다줬다. 오래전 이미생이라는 사람이 한 번 신리 마을을 둘러보고 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이미생은 이여성의 차녀다. 강성희 씨는 오부잣집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고 했다.

▲이여성의 딸이 아버지 고향 마을을 다녀간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칠곡군 지천면 신리 강성희 씨의 집.

“오부잣집은 이제 전부 집 다 뜯어가고, 망해서 사람도 없어요. 나도 거기 살았다는 것만 알고, 아무것도 몰라요. 살던 사람도 망하면 뭐 쓸 게 없어요. 다 문대뿌고 토지 다 만들어서. 싹 다 밀었어요. 거기 담장이라도 아직 남아있나 몰라. 길가에. 그것도 다 무너져서 없을 겁니다. 우리들도 어릴 때라서 자세한 건 몰라요. 어릴 때는 거기 가서 많이 놀았는데, 그 시절 80년도 더 된 일이고. 이제는 그 이야기 알 만한 사람이 마을에 없습니다. 이제 못 찾아요. 일절 망하는 바람에 종적을 감췄어.”

칠곡군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주변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최종 방어선이 펼쳐진 곳이다. 칠곡은 관을 중심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막았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라는 자부심이 자리 잡았다. 최근 칠곡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학살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장군에게 명예군민증 수여를 추진했고, 의회도 승인했다.

▲(왼쪽) 이여성, (오른쪽) 백선엽

누구를 추념하느냐.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진다. 왜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는 추념 받지 못하는데 간도특설대 출신 인물은 기념되는가? 독립운동을 했으나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면 추념해서는 안 되는가? 독립운동을 했으나 월북했다면 연구조차 할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애초에 독립운동가를 추념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인가? 질문이 많다. 하지만 칠곡군이 스스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여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을 만났다면 인간적인 면모를 묻고 싶었다. 이여성의 행적을 추정해보면, 망설임 없이 옳은 길을 결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망설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재산을 처분해 벗(약수, 약산)과 함께 만주로 떠난 것도, 만주에서 기약하던 일을 뒤로하고 삼일운동에 맞게 귀국한 것도, 대구에서 독립운동과 이로 인한 투옥도, 기자로서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꾸준히 주장한 것도, 좌우합작에 실패한 뒤, 어린 자식을 다섯이나 남겨 두고 월북을 결심한 것도.

그의 이력을 보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느끼기 어렵다.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서 이여성은 분명 갈등했을 것이다. 갈등 끝에 신념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갈등을 독자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독립운동에 대해 감히 상상컨대, 고난과 고통으로만 가득 찬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신념을 좇아간 길 위에, 분명 기쁨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보성학교를 뒤엎으면서 느꼈을 희열, 만주 땅을 밟고 조선 동지를 만나며 꾼 꿈, 일본 유학 시절과 상해에서 아내 박경희와 함께한 기쁨, 일제 패망 전에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민족 복식을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혀 조선 최초 “패션쇼”를 열었을 때도 분명 유쾌했으리라.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의 길에 나섰을 때도, 이여성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후손을 만났다면 이여성의 월북 후 어떻게 남한에서 살아왔는지도 묻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여성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분단이라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여성에 대한 기록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다.

이번 기사는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쉽게 풀어 놓은 수준이지만, 이여성을 포함해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되살펴 볼 작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여성의 행적에 관심이 있다면,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가 쓴 논문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고려대학교 대학원, 2013.)에 기사에 나오지 않은 많은 내용이 있음을 알려 드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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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성명의 반향 강권발동이 적절”, 동아일보, 1945.12.13
“인민공화국존재는 조선독립달성을 방해”, 동아일보, 1945.12.13
“선거법회부직시공포 민의의입법부창설”, 동아일보, 1947.8.14
“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의 혐의”, 동아일보, 1947.8.14
“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김문성 국악평론가, 동아일보, 2018.2.8

#도움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최재성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윤오 칠곡문화원장
이한용 느티나무 헌책방(바우북) 대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성희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 주민

  1. 14일 “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 혐의”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1946년 정판사위폐사건을 지휘하며 좌파 근절에 나섰던 이인 검찰총장의 담화문이 나온다. 그는 담화를 통해 “현 질서를 파괴하고 치안을 교란케 한 혐의로 좌익계열의 정당단체 간부를 대량 검거해 취조 중이며, 엄정한 처단이 있을 것”이라며 “당국은 물 샐 틈 없는 경비태세를 갖추고 있으니 8·15기념일을 마음껏 기뻐하라”라고 밝혔다. 같은 날 신문 1면 머리기사는 미군정이 이승만, 김구와의 면담자리에서 남측의 단독선거와 관련한 선거법 공포 지연을 우려했다는 내용이었다.
  2. 이한용 씨 가족은 이여성이 살던 집의 일부를 매입해 칠곡군 지천면 신리 223번지로 옮겨왔다.
  3.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 패망을 예측한 이여성은 해방된 공간에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조선복식고>를 발간하기 전에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반박할 수 있는 실증 자료로 <숫자조선연구>를 연재했다.
  4. 이쾌대에 대한 해금은 1988년 이뤄졌다.
  5. 錚錚한 當代 論客의 風貌, <삼천리> 4권 8호. 1932. 8. 1.
  6. 대정8년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출판법 위반죄
  7. 중국 군벌과 장개석의 북벌군과의 전투.
  8. 學友會講演團(학우회강연단) 第二隊不起訴(제이대불기소) 칠월삼십일일에, 동아일보, 1923.8.2
  9. 삼월회에는 박경희와 더불어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정칠성도 참여했다
  10. <동아일보>:[김문성의 盤세기]대박난 ‘사의찬미’… 흉내낸 ‘애상부’는 쪽박
  11. ···이군은 다독다방면임과 그 근면과 정력인 점에 잇서 조선의 인테리중 단연 제1류에 속할 인물이다. 그가 예술을 말하고, 정치를 말하고, 스포쓰를 말하고, 說去 說來하는 것을 드를때 그는 확실히 시대감각에 예민한 朝鮮에 잇서 가장 진보된 인테리의 하나이라는 것을 누구나 수긍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凡然한 상식인은 안이다. 그는 확실히 朝鮮의 사회적 발전단계에 보조를 함께한 정열의 소유자엿고 과학을 밋는 학도적 양심의 소유자엿다.···그의 東京유학시대에 잇서서는 사회과학의 전도적 역할 또는 조선의 좌익운동의 뇌류를 일웟다고 할 일월회 의 창설자의 1인으로 또 그 기관잡지 「사상운동」의 경영자-여기에도 그는 만여원의 거액을 부담하엿다-로 또 名편집자로 가장 유력하게 활약하엿다. 그는 각금 연설회에도 참가하엿다.···그때 나는 엇던 노동조합의 대회에서 그가 「릿쿄대학」의 교복을 입고 일월회의 대표로써 축사를 한 것을 들엇다. 내가 그를 처음 대하기는 이때엿다. 그의 첫 인상은 그가 일에 대하야 진실하고 진정에 대하야 열정을 가지고 또 어느 편이나하면 사무적인 침착한 태도를 가진 얌전한 청년이엿다. 그는 그 후 얼마잇다가 왼일된지 그 애인-현재의 부인인 알토 가수로 유명한 박경희씨와 함께 상해로 건너가버렷다.
  12. 이후 1938년 서울 옥인동으로 이사했다. 옥인동 가옥은 2층 양옥집이다. 지금은 옥인동 집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옥인동 가옥에서 이여성은 <조선복식고>를 쓰며 연구했던 전통 의상을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게 하고 사진 자료로 만들었다. 이때 찍은 사진 일부가 <조선복식고> 원고에도 포함됐다.
  13. 국사편찬위는 <국사관논총>에서 여운형 암살에 대해 “미·소 양측 대표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소공위 사업이 다시 정돈되는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반역사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미·소 양대국간의 냉전을 더욱 촉진시키고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일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14. 1947년 8월 14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이인 검찰총장은 “현 질서를 파괴하고 치안을 교란케 한 혐의로 좌익계열의 정당단체 간부를 대량 검거해 취조 중이며, 엄정한 처단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같은 날 신문지면상 머리기사는 미군정이 이승만, 김구와의 면담자리에서 남측의 단독선거와 관련한 선거법 공포 지연을 우려했다는 내용이었으며, 후면에는 “여운형씨 살해사건에 대하여 좌익에서는 우익에 책임을 전가시키려 가진 역선전을 다하나 체포된 범인의 진술에 따라 좌익계의 동지살상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는 서북청년단의 성명도 실렸다. 서북청년회는 김구와 이승만의 자금 지원을 받은 단체다. 서북청년단은 4·3제주항쟁, 보도연맹사건 등에서 민간인 학살을 한 단체로, 훗날 김구도 암살한다.
  15.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로, 과거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을 주장한 것과 달리 조선 내 민족 부르주아도 협력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이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의 집결체였던 신간회도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