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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시작하면서부터 턱 막혔다. 이여성이 직접 쓴 기사, 저서는 남아있지만,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혈육과 연락할 방도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칠곡, 대구 수성구 생가터 인근 주민들을 만나 수소문했다. 연구자들, 이여성 관련 기사를 썼던 기자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만 들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이여성 동생 이쾌대의 아들(故 이한우 씨)을 아는 연구자와 연락됐지만, 그 또한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다.
주로 이여성을 연구한 신용균 고려대 연구교수와 이한용 씨로부터 사실 확인을 했다. 이외에도 웃갓마을 주민, 칠곡문화원, 이쾌대의 후손을 아는 연구자,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등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이여성 일가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여성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절 쓴 기사를 통해 그의 사상이나 당시 한반도 정세와 살폈다. 하지만 본인의 삶과 고뇌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꼭 연고자를 찾고 싶었다. 칠곡군 신리로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향했다. 앞서 칠곡문화원장, 신리 마을 이장과 동행해 예전 이경옥(이여성의 아버지)의 집이 있던 터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곳은 철도가 놓이고 농지로 개간돼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신리 집터 근처 빈집을 뒤지고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에게도 수소문했다. 이경옥의 집 일부가 절간에 팔렸다는 이한용 씨의 말에 인근 사찰도 찾아봤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생가터로 추정되는 주소지의 폐가 창고를 뒤져봤는데, 이가(家) 족보를 발견했다. 이여성 가문인 경주(慶州) 이씨 족보로, 생가터를 찾을 줄 알고 잔뜩 흥분했다. 자세히 보니 광주(廣州) 이씨 족보였다. 혼자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운이 없지는 않았다. 되돌아오려는데 밭을 일구던 한 노인이 자초지종을 듣더니 마을 최고령자 강성희(92) 씨에게 데려다줬다. 오래전 이미생이라는 사람이 한 번 신리 마을을 둘러보고 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이미생은 이여성의 차녀다. 강성희 씨는 오부잣집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고 했다.
“오부잣집은 이제 전부 집 다 뜯어가고, 망해서 사람도 없어요. 나도 거기 살았다는 것만 알고, 아무것도 몰라요. 살던 사람도 망하면 뭐 쓸 게 없어요. 다 문대뿌고 토지 다 만들어서. 싹 다 밀었어요. 거기 담장이라도 아직 남아있나 몰라. 길가에. 그것도 다 무너져서 없을 겁니다. 우리들도 어릴 때라서 자세한 건 몰라요. 어릴 때는 거기 가서 많이 놀았는데, 그 시절 80년도 더 된 일이고. 이제는 그 이야기 알 만한 사람이 마을에 없습니다. 이제 못 찾아요. 일절 망하는 바람에 종적을 감췄어.”
칠곡군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주변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최종 방어선이 펼쳐진 곳이다. 칠곡은 관을 중심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막았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라는 자부심이 자리 잡았다. 최근 칠곡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학살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장군에게 명예군민증 수여를 추진했고, 의회도 승인했다.
누구를 추념하느냐.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진다. 왜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는 추념 받지 못하는데 간도특설대 출신 인물은 기념되는가? 독립운동을 했으나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면 추념해서는 안 되는가? 독립운동을 했으나 월북했다면 연구조차 할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애초에 독립운동가를 추념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인가? 질문이 많다. 하지만 칠곡군이 스스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여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을 만났다면 인간적인 면모를 묻고 싶었다. 이여성의 행적을 추정해보면, 망설임 없이 옳은 길을 결정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망설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재산을 처분해 벗(약수, 약산)과 함께 만주로 떠난 것도, 만주에서 기약하던 일을 뒤로하고 삼일운동에 맞게 귀국한 것도, 대구에서 독립운동과 이로 인한 투옥도, 기자로서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꾸준히 주장한 것도, 좌우합작에 실패한 뒤, 어린 자식을 다섯이나 남겨 두고 월북을 결심한 것도.
그의 이력을 보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느끼기 어렵다.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서 이여성은 분명 갈등했을 것이다. 갈등 끝에 신념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갈등을 독자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독립운동에 대해 감히 상상컨대, 고난과 고통으로만 가득 찬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신념을 좇아간 길 위에, 분명 기쁨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보성학교를 뒤엎으면서 느꼈을 희열, 만주 땅을 밟고 조선 동지를 만나며 꾼 꿈, 일본 유학 시절과 상해에서 아내 박경희와 함께한 기쁨, 일제 패망 전에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민족 복식을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혀 조선 최초 “패션쇼”를 열었을 때도 분명 유쾌했으리라.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의 길에 나섰을 때도, 이여성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후손을 만났다면 이여성의 월북 후 어떻게 남한에서 살아왔는지도 묻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여성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분단이라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여성에 대한 기록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다.
이번 기사는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쉽게 풀어 놓은 수준이지만, 이여성을 포함해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되살펴 볼 작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여성의 행적에 관심이 있다면,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가 쓴 논문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고려대학교 대학원, 2013.)에 기사에 나오지 않은 많은 내용이 있음을 알려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