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이득재 민중행동 공동대표가 지난 11월 9일 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의 기고 ‘전태일 기념식·문화제 유감’에 대한 반론 글을 보내왔습니다. <뉴스민>은 다양한 진보적 담론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모든 글을 환영합니다.
세상은 다양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계의 다양성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들 속에서 살고 있다. 세상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투쟁에서 교보문고에 앉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광화문 투쟁 현장 이순신 동상 바로 옆. 넘어지면 코 닿을만한 도로 옆 김밥 집에서 사람들이 김밥을 먹고 있는 세상은 노동자 민중의 세상이 아니다. 그곳은 소위 시민들의 세상이다. 차벽 사이로 지나다닐 틈이 없자 “시민들 생각은 안 해”라고 투덜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시민이라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이든 그렇지 않은 시민이든 그들은 노동자 민중의 세상에 무감한 듯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동일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고 있으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세상들의 층위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세상은 마치 착취가 만연한 자본주의 세상과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착취가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침투해 있건만, 시민들은 자본주의에 포획당하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는 듯이 자유롭게 살아간다.
서두에서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 영역 또한 서로 층위가 다른 세상 속 공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는 운동 공간이라면 사회운동은 국가에 의한 수탈이 지배하는 공간의 운동이다. 전자가 노동-자본의 힘 관계가 작동하는 영역이라면 후자는 노동시장 바깥 영역에서 국가를 상대로 하여 힘 관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시민운동은 굳이 노동 중심성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곳은 착취에서 벗어난 공간으로서 자본의 착취 방식 이외의 국가의 정치적 억압이나 차별에 저항하는 공간이다. 이 세 가지 운동 공간들은 서로 층위가 다르다. 노동운동은 자본의 착취에 맞서는 노동자의 운동 공간이고, 사회운동이 국가의 수탈에 맞서는 민중의 운동 공간이라면 시민운동은 계급적일 수도 없고 민중적일 수도 없다.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운동 공간들은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세상들인지 모른다.
매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기일을 두고 대구경북 지역에 감돌던 긴장감은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세상들이 서로 간섭현상을 일으킨 결과다.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등 노동자들이 몇 년 동안 지속해온 전태일 기념사업을 두고 시민운동 영역에 몸담았던 사람이 노동자의 기념사업에 대해 유감이라는 둥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면 왜 그동안 몰랐는가? 전태일 열사의 고향인 대구에 전태일 생가 복원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노동운동 영역이 뭐라 딱히 할 말도 없다. 노동운동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헤게모니 싸움을 하거나 훼방 놓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시민운동 영역에서 노동운동 영역의 확산을 주문하거나 훈계할 필요도 없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 열사의 투쟁은 기념사업의 수준을 넘어서서 지금까지도 기념 사업하는 건물 안이 아니라 거리에서 죽음을 넘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층위가 다른 세상들 속에 각자 살면서 자기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상들이 서로에 대해 누구는 전태일의 손가락만 본다느니 누구는 전태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본다느니 하는 말도 우스꽝스런 욕심의 결과물이다.
자본의 시대가 끝장나지 않는 한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착취의 층위와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시민운동은 전태일의 손가락만 볼 수밖에 없다. 전태일의 손가락은 자본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나 고양이는 달을 가리키는 주인의 손을 보지 못하고 그 손만 멀뚱하게 쳐다본다. 이것을 두고 비시장사회론으로 유명한 칼 폴라니의 동생인 마이클 폴라니는 부차적인 의식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손이 가리키는 달, 자본의 착취가 끝장나고 새로이 열리는 노동해방 공간을 보려고 하는 초점의식을 중요시한다. 여기에 냉소주의나 선망이나 질시나 질투, 비판 아닌 비판 따위가 끼어들 공간은 없다.
왜 노동운동은 시민운동 영역으로까지 운동을 확산시키지 못하느냐는 질책 아닌 질책 따위도 무의미하다. 세상사는 곳이 다르다.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노동자 민중의 세상과 다른 층위에 사는 사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비아냥거릴 이유도 없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1990년 박창수 열사, 2003년 김주익 열사의 죽음, 그리고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 등에 대해 시민운동은 당사자가 아니었다. 아웃사이더이거나 관찰자였을 뿐이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자기와 다른 세상을 보고, 그것도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서 그 세상보고 감 내놔라 밤 내놔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찰자의 입장은 죽음까지 불사해야 하는 노동운동의 치열성, 자본의 착취에 맞서 싸우는 노동해방을 위한 그 열정의 길을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온도계로, 바로 물에 담긴 그 온도계 때문에, 물의 온도를 정확하게 잴 수 없듯이, 시민운동은 노동운동의 분노에 끓어오르는 그 반역의 불길이 몇 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을 재겠다고 노동운동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것은 실천 없는 세치 혀의 욕망이자 노동운동의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던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엉겁결에 인정하고 마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노조운동도 아니고 노동운동까지 경제주의에 환원되고 있다고 레닌을 언급하며, 노동운동이 인민의 호민관이 되지 못한다고 질타한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 대한 월권행위이자 변혁과 혁명에 역행하는 행위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썩어빠진 새정치민주연합과 썩어빠지다 못해 아예 문드러져 버린 새누리당이 독식하는 정치판을 또 다시 관찰자로 기웃거리는 행위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우롱하는 처사이자 운동권 꽁무니주의자나 할 일이라 할 것이다.
노동자의 계급운동은 시민운동의 관전평을 원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관전평의 매질은 비판이 아니라 자본에 이어 노동자 계급에게 두 번 상처를 주고 생채기만 덧나게 하는 일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멕시코 치아빠스의 어느 주민 여성의 말이다. 과연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닿아 있는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 그러한 것들은 온데 간 데 없고 노동운동을 폄훼하는 수사만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노동자들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며 폐쇄적 운운하면서 계급운동에 염장질을 놓겠다는 의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계급운동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과 다른 세상의 층위에서 지금도 청춘을 다 바쳐가며 싸우는 운동이다. 층위가 다른 것이기에 폐쇄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노동자 민중의 세상과 다른 은하계에 존재하는 시민운동, 제도정당운동이나 열심히 하시라.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갈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