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장관 이야기로 한창 떠들석했던 기간 중에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조금 아쉬웠습니다.” 글 청탁 메일이 조국 얘기는 그만 쓰라는 취지 같았다. 조국장(場)은 끝났구나. 하지만 어차피 장사 포기한 인생, 꿋꿋하게 쓰기로 했다. SNS의 글을 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훌륭한 재야의 고수들이 대단한 주장과 지적 등을 내놓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신문 방송만 봤을 때는 답답한 일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답한 일의 첫째는 이 모든 일을 세대론으로만 설명하는 시각이다. 앞에서는 명분을 말하면서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며 이 사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해 온 386세대의 위선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른 매체의 글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주장은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와 인구 구조적 요인, 임금체계 등 그 밖의 사회문화적 문제를 뒤섞고 이걸 ‘위선적 진보’의 문제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윗세대의 전횡에 특히 민감하다. 윗세대는 막말로 ‘꿀빨고’ 살았으면서 젊은이들에겐 ‘노오력’을 강요하고 있다고 여긴다. 틀린 얘긴 아니다. 하지만 “5천만 원은 있어도 흙수저 없어도 흙수저”라면서 “기성세대는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돈 벌어 놓고 젊은 세대의 암호화폐 투자는 금지하는 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주장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기성세대 중에서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돈 번 사람이 다수는 아니고 5천만 원을 구경도 못 해본 젊은 세대는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가 이런 주장에 쉽게 공감하는 건 실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윗세대의 횡포를 몸으로 겪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일은 자기가 다 했는데 직장 상사가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포장하고 결과물을 독식하더라는 에피소드는 이제 익숙하다. 이런 에피소드는 보통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배경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최소한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안 되는 중소기업들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세계’이다.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단지 친분이나 인연을 근거로 회사의 실세처럼 군림하는가 하면 사회 생활을 해본 일도 없는 듯한 사장 일가가 낙하산을 타고 ‘나’의 머리 위에 착륙해 온갖 기상천외한 갑질을 한다.
상사는 왜 부하가 쓴 보고서를 자기가 쓴 것인양 할까? 그도 나름대로 승진 경쟁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사는 대학 조별과제 모임에서 늘 발견되는 ‘프리라이더’이다. 왜 회사라는 조직엔 온통 ‘프리라이더’ 천지일까? 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내쫓겼거나, 업무 시간에 주식투자를 하거나, 업계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중 재력이 있고 인맥이 탄탄한 몇몇은 회사, 즉 중소기업을 차려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재상과 대신 자리를 나눠줬다.
그러니 어느 회사를 가든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역시 전문직이 돼야한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클라이언트의 갑질에 고통받는 ‘전문직’의 SNS 글이 눈에 들어온다.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갑’의 위치에 가는 것만이 답이다. 큰 조직에서 승진하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가성비가 떨어지니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창업을 하거나 비트코인 로또를 맞고 건물주가 돼야 하는데, 쉽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세상은 ‘386’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기득권들이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조국의 위선’까지 보니 열 받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야 한다.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 사익을 추구했다는 것은 일부 정치권과 그 언저리 인사들의 얘기일 뿐이다. 정의를 말했다는 것도 그 시절에 대학 나온 사람들 얘기다. 대다수의 그 세대 사람들은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살았다. 범위를 운동권으로 좁혀 놓고 볼 때 특히 그 세대가 많은 것이고, 운동권 출신이니까 정치권 언저리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또 많을 따름이다.
회사의 ‘꼰대’와 ‘프리라이더’들의 문제는 나이와 경력으로 ‘실력’을 깔아 뭉개고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전근대적 습속과 그것을 용인하는 조직 시스템에서 온다. 실력도 없으면서 고임금을 받는 ‘철밥통’들은 여기에 임금구조의 문제까지 겹쳐진 결과이다. 물론 이는 윗세대 엘리트들이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표리부동한 386’을 비롯한 기성세대를 인적청산한다고 해서 개선되는 문제도 아니다. 인구구조의 문제 등이 있다지만 그래봐야 ‘노동시장 유연화’에 백기투항하거나 586이 497되고 308되는 악순환이다.
‘386’이 공적이 되니 여당은 ‘386’ 딱지가 붙은 정치인들을 물갈이 할 기세이다. 아무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는 입장에서 볼 때 일단 물갈이는 환영이다. 그러나 물갈이를 하더라도 올바른 방향이어야 한다. 여의도 호사가들은 쫓겨난 ‘386’들 자리에 정책적 전문성이 있는 관료 출신들이 진출하지 않겠느냐고들 한다. 내년 총선은 위선자의 대의명분이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전문성이 중요한 국면이 될 거라는 거다. 그 관료 또는 전문가 출신들의 정치적 지향은 ‘386’보다 오른쪽을 향하면 향했지 결코 더 개혁적이진 않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랬더니 손바닥을 앞뒤로 영원히 뒤집기만 하는 일의 반복이다. ‘386 위선자론’은 이런 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답답한 일의 둘째는 조국 뉴스가 ‘계급 문제’라고들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물론 개중에는 핵심을 찌르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유력 언론에서 ‘메이저 담론’을 이끄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다 보면 이게 왜 ‘계급 문제’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검찰이 아닌 이상 ‘조국이네’(조국 장관의 5촌조카라는 사람과 그 일당의 통화 녹취에 나오는 표현이다)가 어떻게 살았는지 실제로 알기는 어렵다. 추측을 해볼 뿐이다. 재산이 56억씩 되는 사람이라도 남편의 5촌 조카가 펀드운용사를 만들겠다는데 대고 몇 억, 경우에 따라서는 10억원에 가까운 돈을 함부로 빌려 주진 않을 것이다. 정경심 교수가 모든 사건의 ‘설계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5촌 조카’ 조모씨가 하려는 일이 위험한 수준에 있다는 것은 대략적으로라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죄가 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런 결단의 추진력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좋은 일’ 하느라 재산증식과 입시에 도움이 안 되는 배우자를 대신해 가계 경영과 육아, 다시 말해 재산과 학벌의 대물림을 전담해온 일의 연장선은 아닌가? ‘바깥 일’에 바쁜 ‘아빠’들을 제치고 ‘엄마’들이 입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일은 이미 익숙하다. 이른바 ‘치맛바람’이다. 이를 다룬 칼럼도 이미 나왔다. ([아침햇발] ‘386 엄마’의 비극 / 김영희, 한겨레신문, 2019.8.29)
논문 제1저자 논란에 대해 한쪽에서는 고교생 저자의 ‘자격’을 말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저 자리라면 과연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란 물음에서 다들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우리 아이가 특목고 유학반이었다면 과연 학부모 모임에 나가지 않았을까? 거기서 단국대 의대 교수 배우자와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면 ‘스펙 품앗이’(물론 이는 그저 의혹이다)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제대로 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계급 문제’란 경쟁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나’는 가지지 못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공정성’이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비슷하게 맞추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그러나 ‘계급 문제’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은 영국 미들랜드 산업도시인 해머타운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백인 노동자 가정 남자 아이들을 심층 인터뷰 한 결과물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싸나이(lad)’라고 부르며 공부와 학교를 멀리하고 쌈박질이나 일삼은 결과 블루칼라가 되는 것을 당연하고 바람직한 인생으로 여긴다. 학교는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을 통해 이런 상황을 결과적으로 조장한다. ‘싸나이들’의 세계관에서 권력의 재생산 도구인 학교에 저항하는 일은 백인-남성 중심으로 위계화돼있다. 이는 노동계급 내부의 이중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중산층과 블루칼라의 계층분립을 재생산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도 계급의식의 한 종류이긴 한 것이다.
바람직한 해법은 이런 계급의식을 없앨 것을 주장하면서 공정한 경쟁 질서를 만들면 누구나 화이트칼라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블루칼라의 정치적 권력을 확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구체적 방법은 아마도 다른 소수자들과의 연대에 기반한 조직화와 이를 통한 정치적 실천에서 나올 것이다. 유럽의 극우포퓰리즘은 이 정치의 실패로부터 비롯됐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담론은 거기까지 가지도 못한 상태이다. ‘공정성’과 ‘위선’이 최대 화두인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왜 경쟁에서 이겨야 하나? 애초에 경쟁을 왜 해야 하나?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경쟁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의 현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해줄 정치가 실종됐다는 게 가장 크지 않나 한다.
한국사회에서 이 정치적 역할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원내의 유일한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조국 장관 임명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지 못하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태도로 뒷걸음질 쳤다. 조선일보가 사설 제목에 ‘정의당’을 넣는 것은 실로 흔치 않은 일이다. 보수언론의 공세 속에 정의당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조국 장관 임명을 용인한 ‘386 위성 정당’이 되었다.
여기에 제대로 반론을 못하는 상태에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21일 “송구하다”고 했다. 원래대로면 조국 장관 임명 반대가 맞는데 개혁 대 반개혁이 되는 바람에 개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사과의 이유다. 보수세력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는 얘기로 들릴 것이다.
‘청년전태일’이란 단체 역시 진보정치의 난국을 보여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조국 장관과 공정 정의 희망 등등의 이름이 붙은 사다리를 들고 찍은 사진은 이들 주장의 정당성을 강조해온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정의당과 마찬가지로 결정적 순간이 되면 진보정치는 ‘위선적 386’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집단과 초록이 동색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 결과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게 답답한 일의 세 번째다.
‘위선적 386’과 ‘반개혁세력’은 모두 엘리트 정치에 대한 대중적 반감으로부터 연유한 구호이다. 둘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엘리트 정치를 인준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과거 진보정치의 혁신을 말할 때 일부 노동자만 대변하는 정치를 바꾸자고 했지 노동운동과 결별하고 엘리트 정치에 투항하자고 하지 않았다. 내버려 두면 극우정치의 지지자가 될 해머타운의 ‘싸나이’들이 문제가 많아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적어도 경쟁에서 도태돼 무능하고 자격이 없는 무임승차자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을 정치의 무대로 밀어 올리는 일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어야 한다. ‘6411 버스’ 이야기도 그런 거였다. 진보정치는 지금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서 누구를 대변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내놔야 한다. 두고 보거나 기다리는 것은 할 만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