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들이 1남 3녀라, 내 자식들도 다 여기서 다 나고 자랐다고, 돈 없는 내 입장에선 이렇게라도 여길 남겨둘 수 있으면 자식들한테도 좋겠지”
“그러네요. 선생님 가족도 3대가 이곳에서 사신 거잖아요?”
“그렇지, 내 아버지부터. 손자도 있으니까 4대지. 손자도 왔다 갔다 한다니까, 이번 추석 때도 저 마당에 자리 깔고 놀고 했다고. 촌집하고 똑같지”
17일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 만난 최용출(69) 씨가 온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날 오후 3시 최 씨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과 8년 전쯤 한 약속을 지키게 된다. 최 씨는 14살이 되던 무렵인 1964년경에 남산동 2178-1번지로 이사와 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부모님이 떠나신 후 지금까지 55년째 살고 있다.
유년시절을 제외하면 한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최 씨도 8년 전 무렵 낯선 이의 방문이 있기 전까진 집이 갖는 다른 의미를 알지 못했다. 8년 전 찾아온 이는 형님과 가족들이 살았던 집이라며 언제가 되든 집을 살 테니 허물지만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낯선 이는 전태삼,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었다.
“한 7, 8년 될거라.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 씨, 그분이 와서 이야길 하는 바람에 나도 알게 됐지. 그분이 이걸 좀 어떻게 해야겠는데, 당장은 어렵다고 좀 참아주면 언젠가는 사겠다고 하더라고”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남산동 5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이제 허물어져 도로가 되어버렸다. 삶의 흔적이 남은 곳은 1963년 대구로 되돌아와 잠시 살았던 집뿐이다. 그곳이 바로 최 씨가 한평생을 살아온 이곳이다. 이 집에서 전태일 열사는 1964년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전까지 살았는데,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일기에 썼다.
올해 3월 창립한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은 지난해 12월 이 집을 매입할 계획을 갖고 시민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창립총회를 가졌던 3월까지 약 5천만 원을 모았고 현재까지 1억 원 가량을 모았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종잣돈은 모였다고 보고 17일 최 씨와 매매계약을 맺는다. 전태삼 씨가 허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후 8년 만이다.
김채원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는 “추가로 기금이 조성되면 내년 6월에 매입을 완료할 예정이다. 매입이 마무리되면 이후 기념관 조성은 기금을 내어주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갈 계획이다. 단순한 전시관을 넘어서 노동과 인권의 교육도 가능한 복합적 공간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은 전태일 열사가 살던 시절과 모습이 많이 바뀌긴 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 집 대문 옆으로 있던 이른바 ‘문간방’에서 살았는데, 문간방은 2009년 무렵 최 씨가 직접 허물었다. 전태삼 씨가 찾아오기 2~3년 전에 일이다. 대문과 담장도 2016년에 허물어서 지금은 나무로 새로 짠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최 씨는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무더위가 극성이었던 지난해 여름에는 부인과 마당에서 모기장을 쳐놓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였다. 집안은 에어컨도 별무소용일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이다. 최 씨는 집을 허물고 새로 짓거나 이사를 가야 한다는 자식들 성화에도 낡아 허물어질 위험이 있거나 내려앉은 곳을 조금씩 보수하면서 여태 집을 지켰다.
최 씨는 전태삼 씨를 만나기 전까지 전태일 열사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오히려 ‘열사’라는 이름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최 씨는 “자식들이 힘들었지. 허물고 조립식으로 새로 짓자는 걸 안했으니까”라며 “내 나이 되면, 약속 한 번 하면 끝까지 지켜주는 게 있지. 성격도 그렇고 해서 참았지”라고 집을 허물지 않고 살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이후에도 모금을 계속 이어가 내년 6월까지 목표액 5억 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오는 23일 대구 중구 ‘몬스터즈 크래프트 비어’에서 기념관 건립 후원 행사도 열 계획이고, 향후에도 크라우드 펀딩이나 음악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모금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