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글 스토리’ 이후 20년, ‘불빛 아래서’로 기록되다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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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글 스토리”를 아시나요?

▲김홍준 감독

김홍준이라는 감독이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창기를 일궈놓고도 시장님 성함을 틀렸다는 이유로 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해직된 후 충무로 뮤지컬영화제를 이끌었지만, 올해 또다시 행사가 중단되는 비운을 맞았다. 지지리 복도 없는 영화제 관계자로 기억되지만, 1994년 <장미빛 인생>으로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함은 물론,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저자로도 유명했었다.

그런 촉망받던 감독이 당시 시나위 등 하드록/헤비메탈 밴드가 부침을 겪던 시기, 그리고 크라잉넛 등 홍대 인디씬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직전 록 밴드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후속작품이 1996년 영화 <정글 스토리>다.

당시 윤도현은 포크록 분위기의 1집으로 잔잔한 반향은 일으켰으되 아이돌 그룹과 발라드가수에 밀려 현재의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윤도현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무명 록 밴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 <정글 스토리>이다.

故 신해철이 참여한 영화음악이 화제 됐지만, 흥행에는 철저히 실패했다. 이후 김홍준 감독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영욕의 시간을 보낸 후 아직까지 소소한 단편이나 기록 다큐멘터리 외에 극영화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정글 스토리>는 지방에서 상경한 주인공 윤도현이 당대 록커의 성지, 낙원상가에서 일하며 음악의 꿈을 꾸며 시작된다. 동료들의 소개로 밴드에 들어가고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그런 윤도현의 재능을 발견한 퇴물 프로듀서 김창완(산울림의 바로 그!)이 음반 제안을 하고 작업은 진행되지만, 아이돌과 댄스뮤직의 전성기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음반회사 결정으로 앨범은 발매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윤도현과 그의 밴드 “이지라이더”를 알리고 싶던 프로듀서는 본인 집을 담보로 잡혀가는 등 온갖 곡절을 겪는다는 줄거리이다.

괜찮은 완성도와 수준 높은 영화음악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공식관객집계 6천 명에 그치며 흥행에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화음악 트랙 중 <가을 우체국 앞에서>와 <사랑 Two>는 이후 윤도현의 대표곡이 되었고, OST는 40만 장이 넘게 팔려 음반사만 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윤도현은 YB밴드를 결성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도현으로 성장한다. 윤도현은 본인의 영문 이니셜을 밴드 명으로 했지만 수익은 균등하게 나누는 등 모범적인 밴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바, 그 밴드의 스태프로 활동하다 독자적인 밴드가 결성된 사례가 있다. 이제 경력이 10년 되어가는 인디 록 씬의 중견 실력파 밴드 “로큰롤라디오”가 그들이다. 그들의 곡 중 “불빛 아래서”라는 노래에서 출발한 어떤 결과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2. 2017년, 영화제에서 <불빛 아래서>를 만나다

2017년 2월, 서울의 한 동네 목욕탕이던 폐건물을 활용한 상영회와 전시행사가 열렸다. 독립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실험영화를 각자 작업하던 신진감독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영화제라는 좁은 문을 건너기에 녹록치 않거나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을 경험하며 독자적인 상영 기획을 여러 방식으로 실험하는 중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한 화제성을 불렀던 기획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독립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불빛 아래서>를 만났다.

작품을 만든 조이예환 감독과는 다른 독립다큐 영화의 프로듀서로 처음 만났다. 그런 감독이 홍대 인디씬을 다룬 다큐를 찍었다고 해서 흥미를 가졌다. 당시엔 2시간에 가깝던, 지금보다 대용량의 초기 버전 <불빛 아래서>를 목욕탕 창고에서 접했다. 그리고 2달 후 그 작품은 필자가 활동하는 대구사회복지영화제의 개막작이 됐다.

대개 영화는 기승전결, 혹은 점점 밀도를 높여 중후반부에 정점을 찍는 극적 구성을 가진다. 극영화는 대개 그렇다. 다큐멘터리도 조금 차이는 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빛 아래서>는 감독 스스로가 그가 담으려 했던 홍대 인디밴드들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 정반대의 구조를 취한다.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전반과 불빛 근처에는 이른 것 같지만 결국 불빛 아래서 부유하는 후반의 대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후에는 다소 완화되었지만 초기 버전은 아예 RPG 게임에서 단계를 올라가듯 홍대에서 밴드가 성공가도를 걷는 구도를 묘사한다. ‘리슨1’ ‘리슨2’ 이런 식으로 설정을 해놓고 진행된다. 영화라기 보단 오히려 유튜브 동영상을 이어붙인 모양새다. 극적 형식구조의 전형을 따르기보단, 감독 자신이 깊게 공명하고 애정하는 음악인들의 이상과 현실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데 이 돌발적인 시도는 확실한 독창성으로 다가왔다.

<불빛 아래서>는 3개 밴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앞서 언급했던 “로큰롤라디오”와, 부산과 김천, 프랑스에서 유학 온 멤버들의 조합이 독특한 “웨이스티드 쟈니스”, 그리고 가장 나이가 적고 신예에 속하는 “루스터스”가 주인공들이다. 각 밴드는 나름대로의 계획 하에 움직이며 독자적 줄거리가 진행된다. 그러다 공연이나 오디션에서 서로 만나거나 하는 식이다. 3개의 밴드는 홍대 씬에서 비교적 잘나가는 상위권 팀들로 골랐다. 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검증된 실력과 경력을 가진 이들 밴드는 록 스타를 꿈꾸며 여러 대회나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고,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기도 하고 국내외 록페스티벌이나 단독공연도 성사된다. 지방에서 공연기회 잡기도 근근한 로컬밴드가 보기엔 이들의 활동은 꿈의 그것이다. 해외공연에서 들뜬 밴드 멤버들의 표정은 그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림이 나온다.’ 하지만 전반부는 거기에서 멈춰진다.

성장하던 밴드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표류하거나 정체되기 시작한다. 세련된 연주 실력으로 인정받는 “로큰롤라디오”는 모 국제영화제 축하공연에서 악기를 치는 시늉만 하는 ‘핸드싱크’를 요청받는다.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춰온 절륜한 연주력을 가진 밴드에게 이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으나 고민 끝에 수락한다. 그들에겐 기회가 간절하니까. 그런데 핸드싱크 중 기타줄이 끊어지고 객석에서도 알아채는 순간, 음악은 예정된 바대로 계속 흘러나오고 멤버들은 관객을 응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조락이 시작된다.

“웨이스티드 쟈니스” 또한 뉴욕 거리공연을 하거나 음반사에게 계약금도 받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결국 방송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꽤 상위권까지 진출해도 자력갱생할 수준의 ‘벌이’는 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뭔가 될 것도 같은데 막상 되는 건 없는 도돌이표에 실망한 멤버가 탈퇴한다. 탈퇴한 멤버의 자조는 후반부에서 전환점으로 흘러가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씁쓸한 대목은 본 작품이 단순한 음악인들을 조명하는 작업이 아니라 밴드들을 ‘거울’로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의 어떤 특질과 조건을 드러내고 비추는데 활용된다.

“루스터스”는 뭔가 도약이 시작될 것 같던 즈음에 느닷없이 해체된다. 멤버들은 각자의 활동을 이어가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밴드들 중 유일한 해산이다. 아직 음악을 프로페셔널하게 할지 안할지, 자신들이 지향하는 음악이 뭔지 굳건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표류하고 방황한다.

▲영화 ‘불빛 아래서’ 가운데

영화의 막판, 인디 밴드들 중 상위 5%로 분류된다는 살아남은 두 밴드는 여전히 생계를 걱정하고 열악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다. 유일한 여성멤버는 지방공연 숙소에서 독방을 써보는 게 소원이라 토로하고, 결혼해서 자녀 돌잔치를 하는 다른 멤버는 아이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름대로 방송출연 경력도 꽤 되는 중견밴드이지만 지역 방송국의 신인창작가요제에 출전하고 이를 자조한다. 영화는 절정기가 아니라 쇠퇴기로 후반부를 기묘하게 편성한다. 수직상승과 추락이 극명한 전반 후반 대비를 이뤄내는 구조는 관객들을 영화 속 현실로 끌고 들어가는 거역할 수 없는 힘과도 같다.

독특한 형식과 생동감 넘치는 밴드들의 음악이 어우러진, 그리고 홍대 인디 씬(그리고 수많은 로컬 밴드들의 체험담까지)의 현주소를 담아낸 <불빛 아래서>는 이후 몇 군데의 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그만그만한 독립영화들처럼 잊혀져가는 듯 했다. 가끔 공동체상영이나 기획전을 통해 드문드문 몇 안 되는 관객을 만났다. 그렇게 필자와 감독, 그리고 출연한 밴드 멤버 몇 명과의 친교를 남기고 영화는 불빛 아래 달려들었다 스러지는 날벌레처럼 사라져가는 줄 알았다.

3. 2019년, 극장에서 <불빛 아래서>를 만나기까지

그런 줄 알았던 <불빛 아래서>가 소규모이지만 극장개봉을 2019년 8월 29일 맞이했다. 전국적으로 20개도 못되는 상영관을 잡아 시작했지만 이조차도 장하다고 봐야할 정도로 근래 독립영화, 특히나 다큐멘터리 개봉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과연 몇 주라도 극장에서 버틸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원래 영화제 버전보다 10여 분이 줄어들고 약간의 편집이 변경된 극장 상영 버전의 <불빛 아래서>는 좀 더 넓은 범위에서 관객을 만날 기대에 차 있다.

인디밴드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전국의 인디 밴드들의 생활과 문화를 현미경으로 보듯 풀어내는 풍성한 내용과 함께 실력파 밴드들의 절창이 빛나는 멋들어진 영화음악, 그리고 감독이 고안한 특징적인 전반과 후반 대비가 돋보이는 구성방식이 매력적이다. 인디 록커들을 다룬 다양한 독립다큐가 2017년 쏟아져 나왔고 몇 편은 먼저 개봉하기도 했지만, <불빛 아래서>만큼 포괄 범위가 넓고 진입 턱이 낮은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인디음악 밴드만이 아니라 독립예술과 창작으로 주목받더라도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없는 한국사회의 황량한 문화다양성과 산업구조를 극명하게 확인시키는 영상보고서의 기능도 성실하게 해낸다.

무엇보다 정치적 입장이나 음악의 극단성에 집중하지 않고, 대다수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우리 주변에서 음악해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청년예술인의 전형을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고시를 준비하거나 취업에 매달리거나 다른 분야에서 사회진출과 안정적 삶을 위해 분투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 실업과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며 꿈을 잃어가는 세태를 풍자한다.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과연 저 젊은이들을 질타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 오히려 우리 사회 시스템이 심각하게 고장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독립문화예술의 자존심이나 과거 블랙리스트 논란처럼 정치적 입장에 따른 유무형의 탄압에 따른 정치적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는 다소간의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단점도 있지만 보편성의 획득이란 측면에서 상당한 강점도 지닌다.

4. <정글 스토리>에서 <불빛 아래서>까지, 한국사회의 변화

<정글 스토리>가 나온 1996년은 IMF 구제금융의 어두운 그림자가 닥치기 직전, 김영삼 정부 하에서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의 단꿈에 잠시 취했던 시절이다. 그 직후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빈부의 격차와 기회의 불평등은 심화 일로를 걷고 있고, 어느새 민주화의 결실보단 경제적 신분에 따른 계급사회가 굳어지고 있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 하고, 취업을 포기하거나 해외로 떠나려는 이들이 역사상 최대라는 음울한 한국사회에서, 불빛을 찾으려 인생을 걸고 노력하는 청년세대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우리 사회는 미래를 상실할 것이다. 그런 거창한 사회학적 진단에 굳이 이르지 않더라도 <불빛 아래서>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모두가 떠들지만 정작 해결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어떤 ‘사실’에 대한 특이한 임상보고서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보고서치고는 무척 재미있고 흥겹다. 그리고 점점 상영시간이 흘러갈수록 웃프다. 무엇보다 세 밴드의 창작곡이 때로는 포효하듯 울려 퍼지고 때로는 자조하듯 수줍게 흘러나올 때 가사와 함께 음미하는 음악들이 너무 좋다. 이 정도 음악을 하나면 겨울에 얼어 죽고 굶어죽는 베짱이는 안 되게 해야 할 것 아닌가.

<작품정보>
정글 스토리 Jungle Story
1996|드라마|한국
1996.05.18 개봉|87분|15세관람가
(감독) 김홍준 (주연) 윤도현, 김창완, 조용원

불빛 아래서 Life is a Dream We’ll Wake up & Scream
2017|다큐멘터리|한국
2019.08.29 개봉|95분|12세이상관람가
(감독) 조이예환 (주연) 로큰롤라디오, 웨이스티드 쟈니스, 더 루스터스
17회 인디다큐페스티발(2017) 초청(국내 신작전)
8회 대구사회복지영화제(2017) 초청(개막작)
1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2017) 초청(한국 음악영화의 오늘 장편)
4회 춘천영화제(2017) 장편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