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악플을 단 네티즌 170명을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현재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댓글 중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하하는 표현인 “나베”라고 하거나 “일본 가서 아베한테 당선 보고 드려라” 등의 내용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네티즌들은 정치인을 대상으로 비판의식이 담긴 악플을 단 것이 어떻게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냐며 이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 공분하고 있다. ‘나베’라는 표현에 대해 “나베는 ‘나경원 베스트’의 줄임말 아닌가요?”와 같이 ‘달창’ 발언으로 문제가 됐던 나경원 원내대표의 해명을 패러디하는 등 비꼼 섞인 여론이 댓글창을 뒤덮었다.
실제로 고소당한 이들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우리 법원은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다소 과격하더라도 폭넓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을 썼던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지난해 명예훼손 혐의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공직에 있는 인물이 가진 이념이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 이념은 철저히 검증되고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허용돼야 한다”며 공직자에 대한 평가는 최대한 허용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직자에 대한 비판이 불쾌할 만큼 날카로운 공격일지라도 이를 처벌할 경우 비판의 목소리를 내려다 단념할지 모르는 상황을 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정치적 행동을 ‘나베’, ‘친일’ 등의 표현으로 비판한 댓글은 표현의 자유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제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고소한 댓글 중에 성적인 모욕, 딸을 언급하며 비하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고소 건을 위임해 진행하고 있는 한국당 당무감사실은 “친일과 관련한 표현들만 언급되며 고소한 것처럼 부각되지만 성적인 모욕, 딸을 언급하며 비하하는 내용 등이 고소 대상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문제가 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국썅 자위녀(나 원내대표가 2004년 일본 자위대 창설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을 두고 붙여진 별명)’, ‘대가리 속에 샵 갈 생각만 있고 주어도 모르는 언년’ 등 여성 혐오적인 의미가 섞여 있는 표현이 다수 존재한다. 나경원 개인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 외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 사례와 연관 지어 여성 정치인 전반에 대한 불신을 넘어 조롱을 드러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여기에 다운증후군으로 알려진 나경원 대표 딸에 대한 비하 표현이 섞여 있다면 이는 장애인 혐오에 해당한다. 이처럼 성, 인종, 종교, 장애 등을 풍자 대상으로 삼는 행동을 과연 권력을 향한 풍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나경원을 포함한 여성 정치인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소비되어왔는가. 권력의 자리에 여성이 등장했을 때 ‘성’을 매개로 한 성 정치학은 필연적으로 작동되어 왔다. 남성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능력보다는 외모가 출중한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표를 결집시켰다. 박근혜, 나경원, 배현진 등은 정치판에 등장할 때부터 끊임없이 외모로 소비되어 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정치 능력과 상관없는 박근혜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나경원의 피부 관리는 늘 기삿거리가 되어 주목을 받았고 배현진은 정치인보다 ‘예쁜 전 아나운서’로 묘사된다. 여성 정치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 정치인과 관련된 기사 댓글에는 늘 ‘-년’이 따라붙는다. ‘년’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척도로 사용되는 중립적인 표현이 아닌, 여성을 낮잡아 보는 시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집착에 가까울 만큼 여성 정치인을 향해 ‘년’을 갖다 붙이는 행위는 결국 이들을 정치인이 아닌 여성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 평가의 결말은 정치 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닌 여성을 향한 조롱으로 끝난다.
이번 고소 건에서 ‘여성 정치인을 비판하는 방법’에 대해 성찰해봐야 하는 이유다. 나경원의 정치 행위에 대한 비꼼 섞인 표현은 폭넓은 표현의 자유 영역으로 남기되, 행위를 매개 삼아 여성성을 공격하는 방식이 정치 권력을 향한 저항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정치인에게도 비난받지 않을 자유, 즉 ‘인격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여태껏 ‘자유’를 무기삼아 약자의 정체성을 공격한 것은 아닌지, ‘자유’의 개념을 게으르게 사유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의 물음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