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들의 짧은 방학이 끝났다. 중간에 끊고 대충 바지춤을 올린 것처럼 학생들은 다시 교문으로 달려간다. 8.15전에 개학이라니. 박근혜 시절 수능 전에 수업을 몰아서 하라는 바람에 여름방학이 짧아진 게 ‘아직도’ 그렇다. 쉬었는지도 애매한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학생들은 가방을 맨다. 시간의 주도권은 다시 학교가 쥔다. 한국 청소년 자살률은 1년에 두 번, 학기 초에 높아진다.1 참 힘겨운 시작이라는 반증이다.
방학이라고 별다른 시간은 아니었다. 2~3주밖에 안 되는 여름방학은 또 하나의 산업이다. 잘게 쪼개어 학원이, 학교 보충수업이, 붐비는 관광지가, 헬스장과 교회가 나눠가진다. 8월 첫 주에 개학하면 에어컨을 틀어도 더운 교실에서 멍하게 앉아 시간을 견딘다.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는데 온전한 쉼을 불온시하는 이 사회의 여백 없는 학교를 생각한다. 첫날부터 많은 학교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습도 풀가동할 것이다.
대구 성서 지역 주민 기본권을 옹호하는 단체들의 회의에서 백 목사님은 야간자습을 마치고 밤늦게 교문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축 처진 어깨와 창백한 얼굴을 보면, 공장 야근을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친다고 하셨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1960~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달을 보고 나와 막차를 타고 간신히 통행금지 시간 직전에 집에 도착하곤 했다.2’는데 태일은 평화시장의 그 고된 시간을 멈추려고 했다. 모범업체 설립은 그 구체적 방법이었다.
‘태일피복’의 워라밸 프로젝트
1970년 3월 내내 태일은, 몇 년 동안 구상해온 ‘모범업체 설립계획서’를 노트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30쪽에 달하는 계획서에는 평화시장에 새 삶의 시간틀을 구현하려는 그의 생각들이 꼼꼼하게 집대성되어 있다. 그는 사업 목적을 ‘정당한 세금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계통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여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썼다.
‘태일피복3’의 직원들은 하루 8시간 일한다.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협력을 배운다. 기술을 배워 일만 하는 회사가 아니다. 교사까지 채용해 공부도 한다. 도서실, 당구대도 있다. 미싱사와 재단사는 똑같이 30,000원, 시다는 8,000원, 재단보조는 15,000원의 월급을 준다4고 한다. 월급 25,000원의 교사 5명 인건비, 직원들의 교육비, 위생비를 책정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제목의 사업계획서에서 태일은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꼼꼼하게 사업방침, 소요 항목과 예산, 긍․부정 요소, 인근 시장 조사도, 제품 종류와 주력 제품 판매 홍보 전략, 기숙사 운영 방침, 휴게 오락시설까지 체계화했다. 태일피복은 학생 기성복을 보급해 맞춤옷보다 싸게 좋은 옷을 입히고자 했다. 여름철에 흰 학생모를 써비스하면 인기가 좋을 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학생 기성복을 만들어 학교에 닿으려는 태일의 그리움이 감지된다.
미싱 50대와 직원 184명 규모의 회사 자본금은 3,000만 원이 필요했다. 독지가를 통해 자본금을 마련하려고 신문에 나온 시각장애인 예술가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편지를 실제로 보냈지만 반송되었다. 태일은 ‘나의 인도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사업방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는 확신과 노트 중간중간 휘갈긴 유행가 가사5사이를 힘겹게 오가고 있었다. 고된 일을 하던 ‘어린 동심’들을 구출한다던 사업 목표는 그 상식적인 정당함 때문에라도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태일의 노트 속에서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학교를 못 다니고 일하던 당시 어린 동심들의 일상을 환기해 보자.
고통에 기생하는 희망
평화시장 여공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다. 옷 만든 만큼 돈을 주는 도급제라 여름 비수기나, 명절 후에 수입 없이 쉬다가 공장을 옮기곤 했다. 명절 앞 대목에는 한 달에 두 번 휴일마저 없이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며칠 몇 주 계속 일했다. 업주에게만 유리한 ‘탄력근로제’로 여공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임금 체불도 심했다. 여공들은 모여 “우리도 명절에 고향에 가게 해 달라”고 외쳤다. 차표를 끊어 놓았는데 사장이 임금을 안 줘 고향에 못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은 이들은 모여 창덕궁, 금곡릉에 가서 손잡고 강강술래를 돌며 분을 삭였다.
신순애6는 열세 살인 1966년 평화시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7번 시다, 3번 미싱사, 1번 오야’로 불리며 일했다. 시다였던 66년부터 미싱사로 일한 75년까지 아침 8시부터 밤 11시 20분 정도까지, 한 달 420시간, 주당 105시간7을 일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과로와 영양실조, 결핵, 위장병, 안질, 저임금에 고달픈 ‘고통의 시간표’였지만, 신흥 자본가로 커가는 사업주들에게는 이윤이 쌓이는 ‘희망의 시간표’였다.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0~2일 쉬는 것은 과연 삶일까. 잠, 조악한 밥을 먹는 것 외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능동적인 여가생활은, 교양을 위한 독서는? 시간이 없다. 영화, 여행, 세상 읽기, 친구 만나기, 데이트가 가능했을 리 없다. 오직 재단사들에게 잘 보여 쉬운 일감을 얻어 조금이라도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 세상일은 업주들을 통해 먼 나라 소식처럼 들었다. 시간은 물론, 세상을 보는 태도와 시야까지 지배당했다.
이들에게 유일한 휴식시간은 의외의 상황에 찾아왔다. 전력 수급이 불안해 이따금 찾아오던 한 시간여의 정전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정전 말고는 하루 종일 일하는 셈이었다. 빨간 옷을 만들면 머리에 빨간 먼지가 쌓이고, 노란 옷을 만들면 머리에 노란 먼지가 쌓였다. 시다들은 성수기에 재단판에 엎드려 서너 시간을 자고 뻣뻣한 몸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비슷한 모습이 떠오른다.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익숙한 2019년의 10대들은 자신의 시간표를 살고 있을까?
한국 10대들의 시간표가 가리키는 곳
2016년 9월 12일 경주에서 강진이 30분 간격으로 발생했다. 바로 학생들을 보낸 학교들도 있었지만 동요하는 학생들을 주저앉혀 계속 야자를 시킨 학교들도 많았다. 제보가 이어졌다. 특히, 경주 지역의 불안과 공포가 컸지만 야간 자습을 시키던 학교의 대응 기조는 역시 “가만히 있어라”였다. 존재를 흔드는 상황과 맥락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돌아온 말은 “학교에서 죽나 거리에서 죽나 똑같으니 여기 있어라.”, “수능이 66일 남았는데 지진이 무슨 대수냐”, “무단외출시 벌점 부과하겠다” 등이었다. 무서운 ‘폐쇄적’ 말들이지만, 교사들이라면 쉽게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지진에서야 마지못해 1, 2학년을 보낸 학교는 고3은 잡아두기도 했다. ‘고3’은 지진도 알아모신단 말인가? 고3이 교실에서 소설을 읽으면 벌점을 받기도 한다. 학교와 공공도서관 열람실에는 온통 문제집, 수험서뿐이다. 총체적 독서, 영화, 여행, 세상 읽기, 친구 만나기, 데이트 등 견문을 넓히고 생각의 기둥을 세우는 풍요로운 일은 만만치 않다.
1주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OECD에 속한 나라 학생들은 1주일에 33시간을 공부한다. 한국 학생들은 초중학생은 4~50시간, 고등학생은 7~80시간을 공부한다. 방학이 되면 하루 10시간을 학원에서 지내기도 한다. 한국의 학교와 학원은 적대적으로 공존한다. 10대의 몸 하나를 두고 양쪽에서 팔을 당긴다. 이 환경에서 공부는 행복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한국의 10대는 성인의 법정 노동시간을 초과해 ‘월화수목금금금’을 치르고 있다. 올해 초 10대들이 UN에 한국 청소년의 인권 보고서를 제출한 까닭이다.
‘한국 사회는 과도한 학습 노동을 통해 과로를 견디는 사람을 길러낸다.’8 2018년에 독일 노동자들은 연간 1356시간을 일하는 동안, 한국 노동자들은 2024시간을 일했다. 멕시코 다음으로 오래 일했다. 이 인내심은 한국인의 기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훈련된 인내력도 한계를 넘은지 오래다. 가장 긴 노동시간은 자연스럽게 가장 높은 산재 사망률로 연결된다. 오래 일해 피곤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니 많이 다치고 죽는 것이다. 한국의 집배노동자들은 연 2745시간 일하다 2018년 25명, 2019년 8명째 과로로 돌연사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이상으로 일하는 택배 노동자들은 8월 이틀만 쉬자며 주문 자제를 요청했다. 나만 그런 일을 안 하면 된다 생각해도 소용없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한국사회의 기본 조건이다.
‘다른 시간’을 살고 싶다
삶의 언어가 달라지는 날이 있다. 전태일이 죽고 나서도 그 맥락을 잘 모르던 신순애는 공부가 하고 싶어 청계노조의 노동교실에 다니게 된다. 평화시장에서 일한지 10년 되던 1975년 봄이었다. 노동교실의 웃음과 환대 속에서 그녀는 자기 삶의 새로운 ‘시간’을 느끼게 된다. 공장 야근 두 시간과 노동 교실의 두 시간은 달랐다. 신순애는 여공에서 노동자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감을 느낀다. 번호로만 불리던 익명의 공장을 벗어나 이름을 되찾아 기쁘다. 삶은 보람과 의미, 인간 권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채워진다. 중앙정보부가 특별 관리 대상으로 감시하던 험난한 청계노동조합 생활은 탄압과 구속의 연속이었지만 ‘인간의 시간’이 시작되었는데 ‘노예’로 돌아갈 순 없었다.
1975년 12월 16일 저녁 8시. 평화시장은 초저녁이다. 청계천 일대 10여 개 상가 580여 공장에 동시에 불이 꺼진다. 정전이 아니다. 청계노조의 요구대로 근로감독과장이 강제로 야간 노동을 멈춘 것이다. 사장들은 한창 바쁜 연말에 마지못해 직원들을 퇴근시켰다. 노동자들은 이날 이른 퇴근을 환희로 기억한다9. 8시 퇴근은 어색하고도 홀가분했을 것이다. 불을 내리게 한 그 단결된 힘이 뿌듯했을 것이다. 안 지켜질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 얼떨떨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날 이후 사장들과의 험한 싸움을 계속되었다.
어쨌든 그날 밤 시간은 유독 알뜰했겠다. 그 짧은 어둠이 보장한 여유 속에서 쉬고, 책도 보고 이야기하고, 음식도 나누고, 삶을 생각하고, 술도 한잔하고, 심야영화도 보고, 사랑도 나누고 심지어는 일찍 자기도 했을 것이다. 오랜 친구에게 편지도 한 줄 썼겠다. 스스로 얻어낸 시간이기에 어제와는 분명 다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다른 시간’을 살아보아야 한다. 태일이 머리를 싸매고 새 시간표를 써내려가던 외로움을 넘어, 세상이 달리 보이던 8시 퇴근의 환희처럼, 스스로 함께 ‘다른 시간’을 만들어 그 기쁨을 찾아와야 한다. 그 기쁨은 숱한 반대 속에 깃들어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서로의 다른 시간을 지지해주면, 그제야 삶이 꿈틀꿈틀 시작될 것이다.
-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 10주년 기념 ‘청소년 자살과 인권 현황’ 토론회에서 세계일보 이창수 기자의 발언 인용. (2017.6.29.)
- 〈열세 살 여공의 삶, 한 여성노동자의 자기 역사 쓰기〉 168쪽 인용, 신순애, 한겨레출판, 2014. 이번 글의 평화시장 이야기는 대부분 이 책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 2019년 개관한 서울 ‘전태일 기념관’에는 이 모범업체를 ‘태일피복’이라는 이름으로 자세히 형상화하고 있다.
- 1970년 가을 평화시장에 돌아온 태일이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재단사는 3만 원, 미싱사는 1만5천 원, 시다는 3천 원을 평균적으로 받았다.
- ‘눈물도 한숨도 나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거리에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맨발의 청춘’, 최희준, 1964)
- 수배 중에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던 조영래는 평화시장의 여공 신순애를 소개받아 인터뷰를 한다. 평전에 나오는 ‘어린 시다’의 모델 신순애는 53세에 늦깎이 공부를 해 ‘열세 살 여공의 삶’이라는 책을 쓴다. ‘국민’학교 중퇴로 중단한 공부를 오랜 세월이 지나 ‘한 여성노동자의 자기 역사 쓰기’로 이어간 것이다. 신순애는 ‘여공’에서 시작해 ‘노동자’로 깨어난 ‘자기 주체화 과정’을 당사자의 육성으로 들려준다. 우리는 전태일이 바라보던 여공들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 2019년 현재 초과근무를 포함해 주당 52시간까지만 일할 수 있다. 주당 49시간 이상을 일하는 노동자가 3명 중 1명으로, 우리는 이 정도의 일을 ‘과로로 번아웃된다’고 말한다. 당시와 비교해 보자.
- 2019년 6월 5일, 대구 성서 와룡배움터에서 진행한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 교사 연수에서 이수정 노무사는 말했다.
- 〈청계, 내 청춘〉 199쪽에서 내용 참조, 안재성, 돌베개,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