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우버, 타다, 쏘카를 ‘공유경제’라 부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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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타락은 언어의 타락으로 표상하기 마련이다. ‘녹색성장’이라든가 ‘창조경제’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다. ‘녹색’과 ‘창조’가 현혹한 세계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본래의 말이 갖고 있던 의미와 가치는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선의로 포장하기 쉬운 말은 본질을 은폐하기 쉬운 법이다.

최근 회자되는 ‘공유경제’라는 말에서도 이러한 기운이 느껴진다. 공유경제(sharing economy)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서로 공유하는 경제활동’을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본격적으로 쓰인 2008년 무렵은 미국발 경제 위기가 세계적 위기로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공유경제는 독점과 불평등 심화로 얼룩진 현행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 혹은 ‘극복’ 방안으로 줄곧 거론되어 왔다.

‘공유’라는 이름의 약탈
하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바람은 아직까지 전혀 실현되지 않았다. 공유경제 모델로 부상한 차량공유서비스 우버(uber)나 숙박공유서비스 에어비앤비(airbnb)는 ‘공유’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표방한 공유란 결국 사업자들의 서비스 거래일뿐이다.

공공의 자산을 나누거나 함께 소유한다는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에게는 남거나 불필요한 재화를 공동체 구성원들과 나눈다는 의미로서 ‘공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차량공유를 표방한 우버는 실제로는 앱기반 택시호출서비스였고, 에어비앤비는 숙박임대사업자들의 정보 공유 플랫폼에 불과했다.

정보기술 기반의 공유경제 플랫폼은 강력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사업 종사자들의 몰락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지난 5월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쏘카’, ‘타다’ 등과 같은 차량공유서비스 시행 반대 시위에서 한 택시노동자가 분신 사망했다. 지난해 카풀 서비스 도입에 따른 갈등으로 택시노동자가 목숨을 끊은 이래, 차량공유서비스 관련 문제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이 3명으로 늘었다.

차량공유서비스가 도입되면서 극단적 갈등을 빚는 현상은 비단 우리사회만은 아니다. 우버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미국 뉴욕에서도 우버의 영향으로 생활고를 못 이긴 택시운전사 8명이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우버의 등장으로 수입이 감소하고 택시면허 가격이 80% 이상 급락하면서 은행권 대출 상환 요구가 빗발치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외에도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차량공유서비스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멕시코 택시노동자들은 우버의 영향으로 40%의 수익이 줄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에서는 우버 차량을 부수는 시위가 이어졌고, 호주에서는 택시노동자와 렌터카사업자들이 우버에 대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대만과 같이 우버의 영업활동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국가도 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동남아시아 각 나라에서 우버는 현지 기업에 밀려 철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예상과는 달리 적자의 폭이 훨씬 늘어나 우버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자동차 판매량이 감소하여 환경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도 실제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차량공유서비스 등장 이후 자동차 보유율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거대 공유경제 플랫폼의 시장 장악에 따른 관련 산업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차량공유서비스는 기존 운수노동자들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2013년 인도에 진출한 우버는 인도의 택시노동자들에게 고소득을 보장하겠다는 감언이설로 수많은 인력을 포섭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수수료가 인상되면서 수익은 줄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우버 노동자들은 해마다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버와 같은 공유서비스 시스템에 들어가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하는 어떠한 복리후생도 보장받지 못한다. 고용주가 분담해야 할 노동자들의 복지 비용은 지불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하락했다. 수익 하락과 더불어 노동 복지의 부재는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공유경제는 가능한가?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 이론에서, 공유지의 희귀한 공유 자원은 공동의 강제적 규칙이 없다면 결국 파괴된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제한과 규칙이 없는 공동의 목초지에서 개인은 각각 자신의 소에게 무한정 풀을 먹인다. 그 결과 목초지는 황폐해지고, 공동의 목초지는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의 비극을 넘어 Governing the Commons』에서 지속 가능한 자발적, 자치적 공유 자원 체계를 구축한다면 공유지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반론을 펼쳤다. 오스트롬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민주적 의사소통과 이해관계자들의 조정을 통해 자율적으로 조직되고. 자치적으로 관리되는 공유 자원은 얼마든지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중앙 정부나 자본의 시장적 개입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자치 능력이다.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 보면 현행 공유경제를 공유경제라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버와 같은 공유서비스 플랫폼을 이용하는 구성원들은 이 시스템 아래에서는 어떠한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참여를 꾀할 수 없다. 플랫폼 이용자들은 오로지 시장논리에 최적화된 서비스 규칙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구성원들은 서비스 규칙에 맞게 자신의 물건이나 재화를 ‘공유’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거래할 뿐, 어떠한 나눔도 실현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공유경제 시스템에서 ‘공유’라는 말은 상품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거래되고 소비될 뿐이다.

또한 공유경제는 어떠한 공공성이나 공익성도 전제하거나 담보하지 않는다. 사적인 거래를 ‘공유’의 방식으로 전환했을 뿐 공동체의 이익이나 가치에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독점적 공유서비스 플랫폼이 공동체 기반의 관계망과 질서를 모조리 파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거대한 기술자본의 횡포에 더욱 고립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이 같은 약탈적 공유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연대와 상생을 중시하는 플랫폼협동조합같은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는 있다. 플랫폼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원리와 가치를 디지털 경제에 접목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의 주체적 참여를 통해 약탈적 공유경제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플랫폼협동조합 역시 디지털 기술 기반의 플랫폼 경제의 한계까지 넘어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협동조합이라는, 인류의 경험이 가장 훌륭히 응축되어 있는 공유경제 시스템이 플랫폼 경제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고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논하기에 앞서 지금의 약탈적 플랫폼 경제를 공유경제라고 말하는 현상부터 분명히 바로잡아야 한다. ‘공유’의 가치를 상품화하고 서비스할 수 있다는 이 같은 어불성설, 즉 언어의 타락부터 뿌리 뽑지 않으면 진정한 공유경제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약탈적 플랫폼 경제시스템을 공유경제라 부르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