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괴물이 2019년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20대 남자’라는 이름의 괴물이. 이 존재는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대표적인 게 최근 3주에 걸쳐 발표된 <시사IN> 20대 남자 특집 기사다. 밝혀두건대 이 글의 목적은 특정 기사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이 글의 의도는, 그와 같은 담론들이 결국 ‘무엇의 이름’인지 질문을 던져보자는 것이다. 먼저 문제의 기사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시사IN>은, 한국리서치와 협력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잠시 할 말을 잃었”을 정도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썼다. 여기서 3주에 걸쳐 나온 주간지 기사 내용을 꼼꼼하게 소개하긴 어렵다.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20대 남성은 “진정으로 특별한 집단”이다. 30대 남성, 40대 남성과도 전혀 다르다. 20대 남성은 여성이 아니라 “공정성을 해치는” 페미니즘과 권력에 반대한다. 이들은 업무능력과 성취동기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나기에 남녀임금격차는 “정당”하다고 보지만, 법 집행이나 양성평등정책은 “엉망진창”이라고 판단한다. 공정성과 경쟁을 중시하는 태도는 전 세대에 공통적이지만, 20대 남자는 유별나게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흥미로운 기사임은 분명하다.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게 투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기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대단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단지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리면 된다. 그러면 저 기사가 말하는 20대 남자의 인식이란 게 “진정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이를테면 18년 전 20대 한국 남자들의 사례. 정확히는 2001년 4월 하순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부산대학교 페미니즘 웹진 <월장>에 술자리에서 권위적 태도와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던 복학생을 성토하는 글이 실렸다. 그 글은 곧 웹에 퍼날라졌다. 이후, 거대한 여론의 쓰나미가 웹을 집어삼켰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예비역 청년들이 반페미니즘 깃발 아래 집결했다. ‘댓글 총공’은 기본이었다. <월장> 멤버들의 ‘신상정보’는 욕설과 함께 폰섹스 사이트에 걸렸다. 젊은 남자들 중 몇몇은 분노를 참지 못해 “직접 테러하러 가겠다” 협박했고, 그 바람에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20대 남자의 난’은 몇 달이나 지속됐다.
당시 나온 분석들이 공히 지적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전국의 20대 남자들이 ‘난동’을 부린 이유가 <월장>에 실린 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월장>은 방아쇠였을 뿐이다. 20대 남자들의 ‘피해의식’은 이전부터 차곡차곡 누적되고 있었다. 1999년 연말 군 가산점제가 위헌판결을 받아 폐지되고, 2001년에는 “건국 이후 처음으로” 처음으로 여성부가 설립됐다. 당시 20대 남자들의 눈에는, 외환위기 직후 급격히 기회의 문이 좁아지는 와중에 사회가, 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기관들이 여성, 페미니즘, 그리고 당시 눈부시게 활약하던 ‘영 페미니스트’의 편을 드는 게 너무나 명백해 보였을 것이다.
18년 전의 그 20대 남자들은 2019년 현재, 대부분 40대 ‘아재’가 됐다. 40대가 된 이들은 그때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변했다면 얼마나 변했을까? 2001년의 20대 남자의 반페미니즘 의식과 2019년의 20대 남자의 그것은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를까? 이를 명확히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조사와 연구, 특히 종적(longitudinal) 분석이 필요할 게다. 18년 전 20대와 지금 20대의 사회의식이 똑같을 수는 없다.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건 있다. 다른 연령‧성별집단과 비교해 보았을 때 평균적 20대 남자의 의식이 자리한 상대적 위치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20대 남자들의 ‘공정성’에 대한 인식도 당대 사회 평균에 비례하여 측정될 가능성이 높다.
처음 <시사IN>의 ‘20대 남자’ 기사를 봤을 때, 이중의 기시감을 느꼈다. 첫 번째 기시감은 2015년 같은 기자가 같은 매체에 썼던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 특집 기사에서 비롯했다. 2015년 기사 역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부각하고 있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이 4년 후에 나온 2019년 기사와 서로 상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기사의 경우 관점, 방법론, 개념의 자의적 사용이라는 면에서 2019년 기사와 견주는 게 미안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지면에 한계가 있으므로 구체적 논의는 다음을 기약한다).
두 번째 기시감은 소위 ‘20대 개새끼론’과 관련되어 있다. 정확히는, 수많은 판본 중에 ‘20대 개새끼론 ver. 2008’이다. 2008년 제18대 총선 직후였다. 선거결과가 어느 정도 확정되자 수많은 진보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20대가 투표를 안 하고 보수화되어 나라가 점점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투표율이 19%밖에 안 된다는 소식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의 심각한 위기’ 제목의 <경향신문> 대담 기사에는 “20대 투표율이 19% 수준으로 나타났는데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수치”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 심각한 위기”, 2008. 4. 10) “저도 20대지만 19%라니 정말 창피합니다” 등 20대의 눈물어린 반성문도 이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19%라는 수치가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18대 총선의 연령별 투표율은 당시까지 발표된 적 없었기에 당연히 19%라는 숫자가 보도될 리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극이 벌어진 걸까? 지식인들, 시민들은 죄다 바보란 말인가?
진실은 때로 허탈할 정도로 단순하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들은 ‘보고 싶으니까’ 본 것이다. 분노를 터뜨릴 대상을 찾아 헤매던 이들에게, 그리고 별로 진보적이지 못한 ‘요즘 것들’이 영 못마땅했던 기성세대에게, 누군가 웹에 올린 ‘20대 투표율 19%’라는 ‘팩트’는 그야말로 결정적 퍼즐조각의 하나로 보였을 테다.
물론 <시사IN> 기사와 2008년 사례는 다르다. <시사IN> 기사는 ‘20대 보수화’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명시적으로 ‘20대 보수화’ 가설을 부정하고 있기까지 하다(그 정도로 극단적인 반페미니즘을 왜 보수화 내지 우경화로 볼 수 없는지 의문이 생겨나지만, 이 논의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2008년의 ‘20대 개새끼론’에 일말의 진실이 있었을지 모른다. 정밀히 조사했다면 2008년의 20대가 이전 20대보다 ‘보수적’이었을 수도 있다. 보수화됐다고 ‘개새끼’라 불러도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런 차원에 있지 않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2019년에도 2008년에도 대다수 언론과 지식인이 오직 양당 구도 내부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기엔 세대 또는 젠더라는 이슈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의제들은 여의도 주류 정치 동학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지금의 20대 남자 담론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세대’와 ‘젠더’의 차이를 말하는 그 담론들에서 ‘계급’은 거의 완벽히 소거되어 있다.
정치 담론이 여의도 양당 정치에 의해 독점되고 여의도 양당 정치는 다시 여론조사 결과로 환원되어 버리는 상황에서, ‘정치’는 “집토끼”와 “산토끼”를 잡는 게임으로 왜소해진다. 그런 정치 환경 속에서는 담대한 정치적 비전보다 데이터에 기반해 영리하게 추출된 전략적 수사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그런 정치 환경 속에서는 고 노회찬 의원이 호소했던 “투명인간을 위한 정치”보다 (20대 남자 같은) ‘문제적 정치소비자 집단’에 대한 맞춤형 대응 매뉴얼이 훨씬 더 시급한 의제가 된다.
어떤 정치세력에 대해 전통적 지지집단이 명백히 지지철회 움직임을 보였을 때, 이유는 크게 셋 중 하나다. 정치세력이 변했거나, 지지집단이 변했거나, 둘 다 변했거나.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언론과 지식인은 지지집단 중 유독 청년세대만 문제화하곤 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금껏 한국 사회는 당장 납득키 어려운 정치적 변동을 설명해야 할 때마다 끊임없이 청년들을 타자화 해왔다.
어떤 청년들이 실제로 괴물이거나 마녀일 수 있다. 아니라 하더라도 그럴 거라 믿는 시민들을 말릴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인‧언론‧지식인은 그런 의심을 부추기기보다 정부와 정당, 공인의 책임을 먼저 제기하고 강조해야 한다. 세대적‧젠더적 레이블링(labeling)은 자칫 낙인찍기(stigmatization)가 되기 쉬우므로 아무리 신중해도 과하지 않다. 그 대상이 의식 변화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큰 청년세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